시집『우리들의 말』1977

<시> 풀과 바람, 나의 詩

洪 海 里 2005. 11. 5. 05:15

 

풀과 바람, 나의 詩

 

홍해리(洪海里)
 

혼자서 스러지고 혼자서 운다
논두렁서 겨우내내 혼자서 앓는
빨간 쓴 나물 뿌릴 위하여
모래알 속에서 하루가 저물고
바람 속에서 하루가 저물고
바람 속에서 한 세기가 깨어난다
늪 위에 둥둥 떠서
한 생애가 바래고
빗속에서 천둥 속에서
한 목숨이 부끄러이 닦이우고 있다
때아니게 등을 치는 허기
슬슬슬 달려와 파도는 일어서고
가새풀숲을 지나 싸움을 돋구는
뜨거운 바람소리
하루를 돌아와 다 잠든 지구의 한 편에서
빨간 살을 내놓고 글을 쓴다
일어서다 스러지고 스러지다 일어서는
나의 시 나의 노래여
포기와 연민과 오류와 절망에 익숙해지는
완전한 불완전인 나의 낮과 밤
저녁 한밤 잠든 어린아이의 눈을 만나
유쾌한 잠시의 친화
바람은 어디나 있어도 잡히지 않고
불타는 빈 들의 저쪽
어둠 속으로
이슬이 내려 먼 곳에 들리는 인기척
시간은 끝이 보이지 않고
기다리는 자는 기다림에 익숙해
바람을 일으키는 풀잎은 스러지고
스러지는 바람으로 풀잎은 일어선다.

 

- 시집『우리들의 말』(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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