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9

백로白露

백로白露 洪 海 里  백로白鷺가 풀잎마다 알을 낳았다반짝 햇살에 알도 반짝! 알 속에 하늘과 바다가 하나다 너무 맑아그리움이나 사랑 그런 게 없다 은은한 인생!     봄을 낳고 여름을 품은 알이 얹힌 풀잎에 백로白鷺가 백로白露로앉기까지 밤낮을 굴린 결정, 이 작은 물방울에 하늘 바다 하나라니.   시인도 백로白鷺도 산란의 시기는 다를 것. 포란의 계절 건너면그리움도 사랑도 다 걸러져 이렇게 맑게 맺힌 이슬에는 무엇을담을까. - 금강.

아득하다 - 치매행致梅行 · 413 / 금강

아득하다 - 치매행致梅行 · 413 洪 海 里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아닐지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고들리는 것도 듣지 못 하는 게 우리 사는 지금 여기세상일지니 다 보고 다 듣는다면그립고 아련한 것 없지 않으랴 아련하다는 것그건 멀어서 별이다 아득하다, 사랑! * 감상 그런 날이 올지도 몰라. 멀리 있어도 보이고 들리는 그런 날 있을지 몰라. 아무 데서나 보이고 들리는 사이로사는 날에는 내가 아니고 당신도 아닐 텐데, 그때 우리는누구일까. 영 이별인 그날 우리는 이별인 줄도 모르고이 세상 아닌 줄도 모르겠지. 당신을 다 보지 못하고 당신을 다 듣지 못하는 게이 세상이라면 이대로 좋아. 당신 표정 애써 읽다가당신 마음 한 조각 품는, 이..

<감상> 죽순시학竹筍詩學 / 금강

죽순시학竹筍詩學 洪 海 里  죽순은 겨우내 제 몸속에 탑을 짓는다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물탑이다봄도 늦은 다음 푸른 비가 내려야 대나무는 드디어 한 층씩 올려 탑을 이룬다때맞게 꾀꼬리가 뒷산에 와아침부터 허공중에 금빛 노래를 풀면대나무는 칸칸마다 질 때도 필 때처럼 선연한동백꽃이나 능소화 같은 색깔의 소리를 품어드디어 빼어난 소리꾼이 된다. 숨어 사는 시인이 시환詩丸을 물에 띄우듯대나무는 임자를 만나 소리 한 자락을 뽑아내니산조니 정악이니 사람들은 이름을 붙인다몇 차례 겨울을 지나 대나무가 되고 난 연후의 일이다.   - 월간《우리詩》2019. 12월호. 마디마디 맺힌 말봄이 익도록 기다리다가한 번은 꿀꺽 삼키다가더는 참을 수 없이푸른 비 더듬어 쌓은 것이소리의 탑이라니. 허공에 풀린 새의 노래순에 ..

<감상> 시작 연습詩作鍊習 / 금강

시작 연습詩作鍊習 洪 海 里 엊저녁 난바다로 무작정 출항한 나의 백지선白紙船 해리호海里號 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 오늘 꼭두새벽 빈배로 귀항했다 물고기 한 마리 구경도 못한 채 험난한 바다에서 흔들리다 파도와 달빛만 가득 싣고 축 처진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쓸쓸한 귀항 나의 배는 허공 만선이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허공만 채우고 돌아오던 것이. 만선의 꿈으로 살면서 빈배가 되기 일쑤인 것이 "무작정 출항" 때문일까. 물때를 탓할 것도 아니요 성긴 그물코를 의심할 것도 아니다. 일종의 버릇이다. 어두워지면 슬금슬금 나오는 물고기들의 유혹을 따라 난바다를 헤매는 이. 그러고 보니 새벽녘에 잠깐 뭔가 스친 것 같다. 연필로 노를 젓는 백지에 몇 마리 팔딱거리다가 지워진 소리, 주워 담을 수 없이 순식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