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20

촐촐하다 : 홍해리 / 이동훈(시인)

촐촐하다 홍 해 리 깊은 겨울밤 잠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누가 술상이라도 보는가 생각은 벌써 술잔에서 촐촐 넘치고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곁엔 잠에 빠진 아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 『마음이 지워지다』, 놀북, 2021. 홍해리 시인은 치매에 이른 아내를 옆에서 돌보면서, 일종의 간병기(看病記)와 같은 421편의 시를 네 권의 시집으로 묶어서 출간한 바 있다. 홍해리 시인에게 시 쓰는 일은 평생을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해온 일이기도 했지만, 치매행 관련 시집은 치매 가족이나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한 땀 한 땀 깁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육필 시다. 『마음이 지워지다』는 기존의 네 권 시집에서 출판사 놀북이 가려 뽑은 11..

양 치는 시인 / 이동훈(시인)

양 치는 시인 이 동 훈 서울의 시수헌詩壽軒은 시를 오래 쓰겠다는 사람들의 아지트 같은 곳인데 머물렀다 떠나는 사람 중에 홍해리 시인과 박흥순 화가는 살림을 낸 것도 아니면서 수십 년 동거하다시피 지내고 있다. 어느 해 우연찮게 그 집에 들렀다가 박흥순 화가의 그림 한 점을 오래 보았다. 신작로 미루나무는 미루나무끼리 어깨를 잇고 양 떼는 저희들끼리 어깨맞춤하고 양치기는 양 한 마리라도 길 밖에 날까 봐 장대 잡고 뒤에서 따르는데 다들 저녁밥 짓는 마을로 걸음이 바삐 움직인다. 이웃 나라 천진에서 만났다는 양 떼 그림을 두고 이웃 동네 삼수에서 양치기로 지냈다는 백석 시인을 생각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문단에 한 개의 포탄처럼 내린 백석이 정주, 서울, 도쿄, 통영, 함흥, 만주, 평양 다니며 종당엔 ..

詩化된 洪海里 2021.10.25

양 치는 시인 / 이동훈(시인)

양 치는 시인 이 동 훈 서울의 시수헌詩壽軒은 시를 오래 쓰겠다는 사람들의 아지트 같은 곳인데 머물렀다 떠나는 사람 중에 홍해리 시인과 박흥순 화가는 살림을 낸 것도 아니면서 수십 년 동거하다시피 지내고 있다. 어느 해 우연찮게 그 집에 들렀다가 박흥순 화가의 그림 한 점*을 오래 보았다. 신작로 미루나무는 미루나무끼리 어깨를 잇고 양 떼는 저희들끼리 어깨맞춤하고 양치기는 양 한 마리라도 길 밖에 날까 봐 장대 잡고 뒤에서 따르는데 다들 저녁밥 짓는 마을로 걸음이 바삐 움직인다. 이웃 나라 천진에서 만났다는 양 떼 그림을 두고 이웃 동네 삼수에서 양치기로 지냈다는 백석 시인을 생각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문단에 한 개의 포탄처럼 내린 백석이 정주, 서울, 도쿄, 통영, 함흥, 만주, 평양 다니며 종당엔..

詩化된 洪海里 2020.07.15

<감상> 방가지똥 / 이동훈(시인)

방가지똥 洪 海 里 나는 똥이 아니올시다 나는 강아지똥이 아니올시다 애기똥애기똥 피어나는 노란 애기똥풀도 아니올시다 겅중겅중 방아 찧는 방아깨비똥도 아니올시다. 詩가 맛이 다 같다고 시가 맛이 다 갔다고 조·용·조·용 소리치는, 나는 향기로운 방가지똥 방가지방가지 피고 지는 방가지똥이올시다. 홍해리 시인은「고독한 하이에나」에서 새벽잠을 잊고 백지 평원을 헤매 다니면서 시를 추수하는 이를 자처한다. 백지선 해리호를 타고 시의 바다로 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가 빈 배로 귀항하기 일쑤인 것이 그의「시작 연습」이다. 잘 죽기 위해서라도 쓰고 또 써서 마침내 “한 편 속의 한평생”을 이루는 게 시인이 꿈꾸는「명창정궤」의 시론이다. 방가지똥도 그렇게 해서 결실한 한 편일 것이다. 방가지똥의 방가지는 방아깨비의 사..

홍해리洪海里(1942~, 충북 청주) / 이동훈(시인)

홍해리洪海里(1941-, 충북 청원) 다음은 란 제목의 임보 시인의 글이다. 세이천洗耳泉 오르는 솔밭 고개 바다만큼 바다만큼 난초蘭草밭 피워 놓고 한란寒蘭, 춘란春蘭, 소심素心, 보세報歲 흐르는 가지마다 그넷줄 얽어 구름을 박차고 하늘을 날다 빈 가슴에 시가 익으면 열 서넛 동자놈 오줌을 싸듯 세상에다 버럭버럭 시를 갈긴다. 졸시집『은수달 사냥』(1988)에 수록되어 있는 「난초 書房 海里」라는 글인데 난정에 대한 인상을 8행의 짧은 시 속에 담아 본 것이다. 그가 난에 심취한 것은 세상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는 남도의 산하를 매 주말 누비며 채취해 온 기천 분의 춘란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집보다 넓은 온실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蘭丁’이라고 칭호한 것이다. 그러니 난정이 난을 ..

방가지똥

* 방가지똥/시집 : 이동훈 시인의 블로그(http://blog.daum.net/hunii70)에서 옮김. 방가지똥 洪 海 里 나는 똥이 아니올시다 나는 강아지똥이 아니올시다 애기똥애기똥 피어나는 노란 애기똥풀도 아니올시다 겅중겅중 방아 찧는 방아깨비똥도 아니올시다. 詩가 맛이 다 같다고 시가 맛이 다 갔다고 조·용·조·용 소리치는, 나는 향기로운 방가지똥 방가지방가지 피고 지는 방가지똥이올시다. 홍해리 시인은「고독한 하이에나」에서 새벽잠을 잊고 백지 평원을 헤매 다니면서 시를 추수하는 이를 자처한다. 백지선 해리호를 타고 시의 바다로 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가 빈 배로 귀항하기 일쑤인 것이 그의「시작 연습」이다. 잘 죽기 위해서라도 쓰고 또 써서 마침내 “한 편 속의 한평생”을 이루는 게 시인이 꿈꾸..

<시> 양치는 시인 / 이동훈(시인) : <그림> 천진의 인상 / 박흥순(화가)

양 치는 시인 이 동 훈 서울의 시수헌詩壽軒은 시를 오래 쓰겠다는 사람들의 아지트 같은 곳인데 머물렀다 떠나는 사람 중에 홍해리 시인과 박흥순 화가는 살림을 낸 것도 아니면서 수십 년 동거하다시피 지내고 있다. 어느 해 우연찮게 그 집에 들렀다가 박흥순 화가의 그림 한 점*을 오래 보았다. 신작로 미루나무는 미루나무끼리 어깨를 잇고 양떼는 저희들끼리 어깨맞춤하고 양치기는 양 한 마리라도 길 밖에 날까 봐 장대 잡고 뒤에서 따르는데 다들 저녁밥 짓는 마을로 걸음이 바삐 움직인다. 이웃 나라 천진에서 만났다는 양떼 그림을 두고 이웃 동네 삼수에서 양치기로 지냈다는 백석 시인을 생각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문단에 한 개의 포탄처럼 내린 백석이 정주, 서울, 도쿄, 통영, 함흥, 만주, 평양 다니며 종당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