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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푸르게 난다 / 금강

새는 푸르게 난다 洪 海 里 어느 순간 '사이'가 '새'가 되었다새가 뜨면 사이는 멀어지고 만다 그새 검던 머리털이 허예졌다빳빳하던 힘이 빠져 가늘어졌다 모르는 새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어느새 머리가 훤하니 시원하다 그예 우리 사이도 뜨고 말았다찰나란 시간은 칼날처럼 푸르다. ― 시집 『찰나는 칼날처럼 푸르다』, 놀북, 2026 눈 깜짝할 사이, 아니 그 생각조차 미처 할 수 없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무언가는 사라진다. 시간을 베는 것인지, 시간에 베임을 당하는 것인지. ‘사이’에서 ‘새’를 건져 올리는 시인의 말놀이는 그 짧은 말의 틈으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멀어지는 관계를 함께 드러낸다. 어느 날 문득, 이미 지나가 버린 찰나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백지에 대하여

백지에 대하여 洪 海 里 백지는 완벽하다 백지는 고요하다백지는 자유롭다 백지는 풍요롭다 백지는 스스로 속도를 갖지 않는다다 잠든 새벽 홀로 깨어 있다 백지는 온전한 여백넉넉한 힘 백지를 죽이는아름다운 폭력이 그립다. ― 시집 『찰나는 칼날처럼 푸르다』, 놀북, 2026 무엇을 쓸까,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어쩌면 백지 앞에 앉는 순간 이미 정해졌는지 모른다. 다만 밀려왔다 흩어지는 생각을 붙잡거나, 처음 마음속에 들었던 말들의 눈치를 보는 일뿐이다. 내게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품고 살아왔는지 비로소 돌아보는 시간이다. 시를 하는 일이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들어오고 나가는 기억들, 어쩌다 오래 묵혀둔 마음을 꺼내보는 일이 아닌가. 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