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애란愛蘭』1998 84

<시> 물

물 洪 海 里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곁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래도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손을 가만히 잡아 봅니다 그래도 또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몸에 살며시 손을 댑니다 그대의 몸에 몸을 대고 있으면 나는 그대로 물이 됩니다 그리 하여, 그리 하여 그대 속으로 서서히 스며듭니다 그러면, 나는 그대와 하나가 됩니다 그대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그대를 향해 가는 길이 납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마다 빛이 쌓이고 쌓여 꽃이 피어납니다 그 꽃이 피워내는 향이 천상에까지 가득 차 오릅니다. -『애란愛蘭』(1998)

<시> 난초꽃 한 송이 벌다

난초꽃 한 송이 벌다 洪 海 里 처서가 찾아왔습니다 그대가 반생을 비운 자리에 난초 꽃 한 송이 소리없이 날아와 가득히 피어납니다 많은 세월을 버리고 버린 물소리 고요 속에 소심素心 한 송 이 속살빛으로 속살대며 피어납니다 청산가리 한 덩이 가슴에 품고 밤새도록 달려간다 한들 우리가 꽃나라에 정말 닿을 수 있겠으랴만,... 피어나는 꽃을 보고 그대는 꽃이 진다 하고 나는 꽃이 핀다 하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목숨은 피어나는데 ……, 참 깊은 그대의 수심水深 하늘못이네. 우리가 본시부터 물이고 흙이고 바람이 아니었던가 또는 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물빛과 하늘빛 속에는 불빛도 피어나 황토빛 내음까지 실렸습니다 올해에도 여지없이 처서가 돌아 와 산천초목들이 숨소리를 거르는데 늦꽃 소심 한 송..

<서문> 난인을 위하여

난인蘭人을 위하여-시집 『애란愛蘭』의 머리말  洪 海 里       난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난을 기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함께 산다고 한다. 인격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 30년 가까이 같이 살아오면서도 나는 아직 난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간에 지은 난에 대한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자 한다. 난은 꽃과 향도 좋지만 변함없는 초록빛 잎만도 일품이다. 난은 기다림을 가르쳐 준다. 은근과 끈기를 익히게 한다. 무심에 젖게 한다.가만히 있어도 난향은 소리없이 귀에 들리고 가슴에 온다. 움직이지 않는 그 춤은 언제나 눈으로 들고 마음에 찬다.아무래도 나는 식물성이다. 한 포기 풀로 풀만 바라보며 사는 청복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