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135

《우리詩》2022. 12월호 '홍해리 신작 소시집'에서

♧ 나는 날마다 무덤을 짓는다 해가 지면 문을 닫고 하루를 접는다 하루는 또 하나의 종점 나는 하나의 무덤을 짓는다 문 연 채 죽는 것이 싫어 저녁이면 대문부터 창문까지 닫고 다 걸어 잠근 고립무원의 지상낙원을 만드노니 둘이 살다, 셋, 넷, 다섯, 이제는 다들 떠나가고 나만 혼자, 홀로, 살다보니 집이 천국의 무덤이 되었다. ♧ 단현斷絃 줄 하나 끊어지니 천하에 소리가 나지 않네 내 귀가 먹은 것인지 내일 없는 어제가 가슴을 치니 잠이 안 와 괴롭고 잠들면 꿈으로 곤비하네 말이 안 되는 세상이라도 물 흐르듯 바람 일 듯 영혼은 이제 유목민으로나 두 집 건너 살아라 산산 강강 살아라 그렇게나 가야지 노량으로 가야지. ♧ 적멸보궁 밤새껏 폭설이 내린 이른 아침 부산한 고요의 투명함 한 마리 까치 소리에 툭..

처음처럼

처음처럼 洪 海 里 '처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겨운가요 '첫'자만 들어도 설레지 않는지요 첫 만남도 그렇고 첫 키스는 또 어때요 사랑도 첫사랑이지요 첫날밤, 첫새벽, 첫정, 첫잔 나는 너에게 첫 남자 너는 나에게 첫 여자이고 싶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따르는 한잔의 술 첫 키스의 아련한 감촉처럼이나 첫날밤의 추억처럼 그렇게 잔을 들어 입술에 대는 첫잔 첫정이 트이던 시절의 상큼함만큼이나 나도 처음처럼 너도 처음처럼 언제나 처음처럼이라면 물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긴 여로 처음처럼 그렇게 살다 갈 수 있다면.

신작 소시집《우리詩》2022. 1월호(415호)

[홍해리 신작 소시집] ♧ 푸른 하늘 무지개 늙바탕에 한무릎공부했다고 깔축없을 것이 어찌 없겠는가 세상 거충대충 살아도 파근하고 대근하기 마련 아닌가 나라진다 오련해진다고 징거매지 말거라 한평생 살다 보면 차탈피탈 톺아보게 되느니 더운 낮에 불 때고 추운 밤에 불 빼는 어리석은 짓거리 하지 마라 씨앗은 떨어져야 썩고 썩어야 사는 법 때 되면 싹 트고 열매 맺느니. ♧ 독거놀이 오늘도 혼자 앉아 물밥 한 병, 닭가슴살 안주해서 한 끼를 때우는데 겨우내 바삭바삭 가물다 모처럼 내리는 비에 귀 열고 속 아닌 속까지 적시니 마당가 청매 가지마다 꽃봉오리 뽀얗게 부풀고 나무 아래 부추와 돌나물도 숨이 가쁜데 대문을 열어 놓았나 현관문은 열려 있나 내다보아도 오는 사람 없고 빗소리만 귀를 씻어 주노니 유언을 하듯 ..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 허향숙(시인)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찔레꽃 洪 海 里 너를 보면 왜 눈부터 아픈 것이냐 흰 면사포 쓰고 고백성사하고 있는 청상과부 어머니,까막과부 누이 윤이월 지나 춘삼월 보름이라고 소쩍새도 투명하게 밤을 밝히는데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ㅡㅡㅡㅡㅡ 아직도 내 안에는 슬픔이 가득한 것인지 많은 것들 중 늘 슬픔에 맨 먼저 마음을 빼앗긴다. 마음을 기울인다. 마음을 준다. 홍해리 선생님은 사단법인 우리시회 이사장님으로 20여 권의 시집을 출간하신 중견시인이시다. 새해부터 '우리詩'에서 낭송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어 뵙게 되었는데 자상하심과 넉넉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자다운 면모에 마음 숙여지는 분이다. 시집 또한 깊은 사유의 맥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고운 인연에 감사드리며 더욱 강건..

막걸리 詩 9편

마시는 밥 - 막걸리 홍 해 리 막걸리는 밥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앉아 하늘 보며 마시던 밥이다 물밥 사랑으로 마시고 눈물로 안주하는 한숨으로 마시고 절망으로 입을 닦던 막걸리는 밥이다 마시는 밥! - 『투명한 슬픔』(1996, 작가정신) 막걸리 洪 海 里 텁텁한 탁배기 가득 따라서 한 동이 벌컥벌컥 들이켜면 뜬계집도 정이 들어 보쟁이는데 한오백년 가락으로 북이 우누나 가슴에 불이 붙어 온몸이 달아 모닥불로 타오르는 숯검정 사랑 꽹과리 장고 지잉지잉 징소리 한풀이 살풀이로 비잉빙 돌아서 상모도 열두 발로 어지러워라 탁배기 동이 위에 동동動動 하늘. - 『투명한 슬픔』(1996, 작가정신) 막걸리 洪 海 里 할아버지 그을린 주름살 사이사이 시원스레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쑤욱쑥 솟아올라 몸 비비는 벼 포기들 ..

월간《우리詩》신작 소시집(2020. 11월호) / 洪海里

월간《우리詩》신작 소시집(2020. 11월호) / 洪海里 〈시작 노트〉 팔십 년을 달려 도착한 곳이 지금 여기 산수傘壽 마을! 이제는 뛰지도 말고 빠르게 걷지도 말자. 세월이 빠를수록 천천히 가자. 느릿느릿 느리게 살자. 좀 게으르면 어떤가 하는 생각으로 개으름쟁이가 되고 싶다. 그렇게 살면서 시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미답 미지의 해리海里 마을에 가고 싶다.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서 사는 요즘 내 시도 나를 그렇게 이끌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빨리, 빨리!’ 하면서 바보같이 살아온 게 내 삶이었다. 시를 쓰고 발표하는 것도, 시집을 내는 일도 그렇지 않았던가! 이제는 배꼽털달팽이처럼 살면서 반딧불이 같은 시를 쓰자. 발광세포를 가진 개똥벌레는 어두워져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내게도 발광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