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552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 치매행致梅行 · 187 홍 해 리 어쩌다 실수로 아내의 치매약을 먹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걸어다니는 일도 차를 타는 것도 다 잊은 상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허우적허우적거리다 때로는 허공을 날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길을 잃고 헤맨 아내 그 뒤를 쫓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여덟 시간 미아가 되었던 아내의 긴 세월을 하룻밤 꿈으로 대신했나 봅니다 아내의 치매약으로 다른 한세상을 구경한 내가 약도 없는 치매환자가 되어 환한 대낮에 길을 잃고 허청댑니다. - - 詩選集 (2021, 놀북) - 원시 출처: 시집 (2017) *홍해리(1942, 충북 청주 생) 1969년 시집 로 활동시작. 시집 外 다수. #홍해리 #치매 #부부..

얼음폭포

얼음폭포 洪 海 里 천년을 소리쳐도 알아듣는 이 없어 하얗게 목이 쉰 폭포는 내리쏟는 한 정신으로 마침내 얼어붙어 바보 경전이 되었다. -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2016, 도서출판 움) * 얼어붙은 폭포를 노래하였다. 마음이 울린다. 그러다가 한동안 마음이 얼어붙는다. 왜 이 시는 따뜻한가. 폭포를 보고 말하되 폭포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인의 ‘인간을 향한 감수성’이 폭포와 함께 떨어지다가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읽는 이의 마음도 폭포처럼 목이 쉬도록 경전을 읽다가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시는 풍경화만으로 끝났을 때는 읽은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없다. 독자의 마음을 울릴 수가 없다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독자들은 그 시를 좋은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 사..

매화꽃 피고 지고

정옥임(시인). 매화꽃 피고 지고 홍 해 리 심학규가 왕비인 딸 청이 앞에서 눈을 끔적끔쩍 세상을 보듯 매화나무가 겨우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 아니라 천등만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가지마다 암향暗香이 맑고 푸르다 다글다글 꽃봉오리가 내뿜는 기운으로 어질어질 어질머리가 났다 계집이 죽었는지 자식이 죽었는지 뒷산에서 구성지게 울어쌓는 멧비둘기 봄날이 나울나울 기울고 있다 시인은 매화꽃이 두근두근 댄다고 했다 꽃 터지는 소리가 그만 절창이라고 했다 한 사내를 사랑한 여인의 가슴이 삼복三伏 염천炎天이어서 두향杜香이는 죽어서도 천년 매화꽃 싸늘하게 피우고 있다 - 「매화꽃 피고 지고」 전문 홍해리 선생님은 이번에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라는 치매 연작시집 4권째를 내셨다. 제1시집 『치매행致..

치과에서 - 치매행致梅行 · 331 / 이인평(시인)

치과에서 - 치매행致梅行 · 331 洪 海 里 아내는 밥도 못 먹고 누워만 있는데 나만 잘 먹고 살자고 새 치아를 해 넣다니 뼈를 파고 쇠이빨을 박다니 내가 인간인가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공간시낭독회 2020. 9월. 제482회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자기 성찰의 의미를 짙게 새긴 시네요. 이미『치매행致梅行』 시집을 발간한 바 있고, 이 연작시를 끊임없이 써서 331편에 해당하는 이 시를 통해, 치매에 걸린 아내를 두고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는 시상이 너무 진솔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네요. 요즘엔 누구나 쉽게 하는 임플란트 기술에 의해 이빨 건강이 많이 좋아졌지요. 하지만 화자 는 아내의 처지에 비추어 치아의 건강을..

여국현 저『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2)』表辭

여국현 著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2)』 지난 몇 해 동안 월간 《우리詩》에 연재된 여국현 교수의「영시 해설」에 소개되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60년대 초의 강의실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작품들을 우리말의 맛깔스런 말맛을 살린 여 교수의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게 되니 마치 우리 시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번역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작업인가. 더구나 시의 번역은 원시原詩의 맛과 향기를 놓치기 쉬우니 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세상과 자연 속에서 사랑하며」, 「인생, 삶과 죽음 사이 아름다운 청춘」이란 부제를 단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2)』에서 사랑, 자연, 사회, 인생, 미美, 삶과 죽음을 다룬 주옥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엮은 두 권의 해설서가 ..

가을 들녘에 서서 /경상일보

가을 들녘에 서서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는 것이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 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 겨운 마음 자리도 스스로 빛나네. [ 詩를 읽는 아침 ] • 홍해리 • 경상일보 2014.11.13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반에 반도 못보고 반에 반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계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은 모든 걸 떨구고 난 뒤에야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둥글게 보이던 나무가 예리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갖가지 형색으로 눈길을 끌던 풀꽃들이 누렇게 마를 때야 동색의 집단이었던 것도 알게 됩니다.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은 순환을 하지만 사람은 평생을 채우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가볍게 떠나야할 때가 왔는데도 놓지..

경영할 때 시를 알았더라면 / 노정남(대신증권 고문)

경영할 때 시를 알았더라면… 노정남│대신증권 고문 지난 6년여 동안 대신증권 대표를 맡았던 노정남 고문은 CEO 자리를 떠난 후 시와 열애에 빠졌다. 그는 1977년 한일은행에서 금융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1987년 대신증권 국제영업부로 옮긴 후 25년여 간 대신증권에 몸담으며 전문 금융 CEO 반열에 올랐다. 1998년 외환위기,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안정적으로 넘기며 성장을 이끌었다. ‘금융주치의 서비스’ ‘빌리브 서비스’ 사업은 고객과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노고문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금융가에서 35년 넘게 뛰어온 노 고문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은퇴 후 그는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대표직을 내던지고 바로 시와 사진, 드럼을 배우며 인생 2막을 열었다...

2023 경북포항시낭송협회 송구영신 시낭송회

2023 경북포항시낭송협회 송구영신 시낭송회 ---------------------------------------------------------- 오늘 2023 경북포항시낭송협회가 주최하는 송구영신 시낭송회의 귀한 자리에 함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해 주신 권양우 회장님과 여러 회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시가 한 송이 꽃이라면 시낭송은 그 꽃을 꽃다발이나 꽃바구니, 또는 화환으로 만들어 꽃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에 신이 주신 고운 음성을 입혀 더욱 향기롭고 화사한 꽃으로 다시 피워낸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소리꽃을 피워내는 시인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쪼록 경북포항시낭송협회가 활발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면서 이곳 포항 지역과 더 나아가 우리나라 ..

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정진희 시인

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이렇게 대접하라」 - “아내는 한 채의 집이었다, 한평생 나를 품어준 집이었다” 「치매행」 86장 「집사람」 치매행* 시편에서 살아있는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무너미골(수유리 옛이름) 산 기슭에 팔순이 다 되어 가는 늙은 지아비 하나, 그는 致梅에 이르는 길,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 아이로 새로 태어난 아내**를 위하여 눈물과 한숨, 지극한 정성으로 하루하루를 봉헌하오니 이런 하늘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처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 함께 살아온 추억이 남은 삶의 동력이거늘 "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텅 빈 슬픔이여" ...「매화에 이르는 길」 치매행168장“빈집 한 채” 나의 강고했던 ..

팔베개 - 치매행 · 65

팔베개 - 치매행 · 65 洪 海 里 ​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듯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 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 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생生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 ------------- ​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시인의 말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이가 되는 병이기에 치매(致梅)라고 부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