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長이여, 詩와 함께 실컷 울어라
유안진(시인)
중년 남성 ‘상처의 꽃’ 시집 찾아
불안한 직장, 이해받지 못하는 가정, 현기증 나는 속도시대의 무한경쟁 사회는, 개인을 얼마나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내몰고 있는가. 살아봐도 별 수 없는 현실과 미래는 얼마나 비정하고 공포스러운가. 삶이란 것을 몸서리치게 체험한 가장들의 상처에서 더욱 제대로 내비치는 자기성찰이 시와 흡사하지 않은가? 간결한 몇 줄의 진실에서 깊고도 긴 울림은, 숨겨온 상처를 스스로 치료할 수밖에 없는 절대고독 그대로가 아닌가. 남모르는 곳에 홀로 숨어, 남모르는 상처를 제 혓바닥으로 핥아 몰래 치료하는 시인의 체험적 처방이자 기도문이자 넋두리에서 ‘이게 바로 나야’ 하는 공감 이상의 감동과 위로를 얻을 수 있겠지.
부친의 김밥 가게를 물려받는다는 구실로 사직한 검사, 잘되는 병원 문 닫고 순두부집을 개업했다고 이혼 당한 의사…. 많은 남성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을 바꾸고, 부인을 바꾸고, 직장과 직종까지 바꾸느라, 새 전공을 공부하러 50줄에 대학에 재입학하는 등 정체성 재확립을 시도한다. 아예 직업을 포기하고 떠도는 50대의 한 가장은 부인과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조차도 용돈만 기대하신다고, 자신은 인간도 가족도 아닌 돈 버는 기계나 돈 되는 알만 낳아야 하는 닭이나 소 돼지에 불과하다고 자조한다.
詩로 위로받고 다시 힘내라
이렇게 누구의 중년이든 중년에는 억울해진다. 살아 보니 이게 아닌데…. 뼈저리게 회한과 재검토와 성찰하는 중년. 카를 융도 중년에 이르러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자기를 찾아 방황하다 미쳐버렸고 가족의 심리적 지지로 마침내 중년기 정신분석이론을 구축했다. 중년 이후부터 가족의 지지가 더욱 필요한데, 타인 같은 가족과 무한경쟁 사회는 이 위기를 더욱 부채질해 혹시 시에서 상담 치료와 종교적 기능까지 기대하는 건 아닐까? 외환위기 때, 평소 네댓 명이 고작인 시·소설 창작교실에 중년남성 100여 명이 몰렸던 일도 비슷한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했으니까.
“문학도 아닌 청소년이 없고 철학도 아닌 노년이 없다”는 말은 이젠 옛말이 됐으니 값없는 시가 제 값하는 시대가 올 조짐인가? 감성과는 거리가 있다던 중년 이후 남성들이 시에서 위로와 성찰을 얻는다니 시(예술)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좋아해도 되나 모르겠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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