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시> 초여름에서 늦봄까지

洪 海 里 2011. 4. 20. 04:41

초여름에서 늦봄까지


1
그해 여름
혼자
빨갛게 소리치는
저 장미꽃더미 아래
나는
추웠네
한겨울이었네
속살 드러내고 속살대는
초여름 문턱에 서서
나무들은 옷을 껴입고 있었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2
천둥과 번개 사이로
불볕더위가 느릿느릿 지나가고
흰 이슬 방울방울
지천으로 내리는
황금벌판---,
발가벗고 누워도
부끄럽지 않았네
온몸의 광채
저 높은 거지중천으로
흥겹게 퍼져
하늘을 덮고 있었네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의 알갱이도 금빛으로 익어
투명한 빛살로 원을 그리고
견고한 열매 속
하늘로 하늘로 길이 열리고 있었네.

 

3
온 세상에 흰눈이 내려쌓여
천지가 적막에 잠길 때
포근한 눈이불을 뒤집어쓴
보리밭 이랑이랑
별로 뜨고 있었네, 나는,
긴긴 밤 서성이며
잠 못 드는 저 보리싹들을 안고
일어서는 은빛 대지는
가장 지순한 한 편의 위대한 시를
깊이 깊이 품어안은 채
수천 수만의 꽃봉오리를 밝히고 있었네.

 

4
산비둘기 울음으로
쑥 냉이 꽃다지 벌금자리로
돋는 사랑이여
차라리 질경이 속에 들어가
작디 작은 씨앗이 되어
그리움이 이는 풀밭길
연초록으로 피어나고 싶네
빛과 어둠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잇는 끈이 되어
두 손길 마주잡고
눈에 젖는 사랑
따숩은 세상길에
그의 시간이 되고 싶네
무량공간으로, 나는.

         - 시집『푸른 느낌표!』(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