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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詩는 넘치는데 詩人은 간데 없네'

洪 海 里 2006. 7. 5. 13:43

"詩는 넘치는데 詩人은 간데 없네…‘엮음 시집’ 독자 싹쓸이"


[동아일보]

시는 죽어 가는가. 적어도 베스트셀러 집계를 보면 그런 것 같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2006년 상반기 시 부문 베스트셀러 1위는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씨가 동서양의 시를 모아 엮은 ‘컴필레이션(편집) 시집’이다. 2위는 ‘생일’, 3위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으로 모두 기존의 시를 모아 엮은 것이다. 이런 컴필레이션 시집은 순위 10위 내에 무려 7종이나 들어 있다. 시인 개인 작품집은 정호승 씨의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김용택 씨의 ‘그래서 당신’, 기형도 씨의 ‘입 속의 검은 잎’ 세 권. 이 중 ‘너를…’은 정호승 씨가 앞서 펴냈던 시집의 시를 가려 뽑은 것이다. 상반기 베스트셀러 집계인데 상반기 신작이라곤 김용택 씨의 시집 한 권뿐이다. 심각한 편식에다 정체 현상까지 빚어지는 셈이다.

‘한국은 시인공화국’이라고 얘기될 만큼 전통적으로 시가 사랑받아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집 판매 순위는 더욱 기이하게 보인다. 해마다 신인 시인이 50명 이상 배출되고 매주 신작 시집이 평균 10권씩 출간되는 등 시 창작 열기는 식지 않기 때문. “시를 읽으려는 사람보다 쓰려는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전문가들은 컴필레이션 시집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장악한 데 대해 “독자의 소비 코드가 잠언에 가깝거나 누구나 이해할 만한 감정에 호소하는 시에 맞춰졌다”고 분석한다. 많이 팔리는 컴필레이션 시집의 상당수가 시라기보다는 경구에 가깝고, 연애의 즐거움이나 이별의 슬픔 같은 감정을 언어의 갈고닦음 없이 쉽게 쓴 작품이 주를 이룬다는 것. 한 시인은 “문장을 행으로 가르기만 하면 시가 되는 줄 아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쉰다.

시가 외로운 세상에 컴필레이션 시집이라도 팔리는 게 어디냐는 한탄도 나온다. 그렇지만 컴필레이션 시집이 쏟아지고 시집 판매를 싹쓸이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려는 시인의 신작 작품집은 점점 더 외면 받을 게 뻔하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평론가 이광호 씨는 “과거 문학과지성사창작과비평 시선집의 경우 신간이 나오면 일정 부수 이상 소화됐는데 1990년대 후반 이후 시장이 축소돼 왔다”면서 “독자들이 새로운 시 문법이나 상상력에 대해선 관심이 엷고, 일시적인 마음의 위로를 주는 것이 시의 기능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대할 만한 신작 시집이 나오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가도 2, 3주 만에 사라지는 게 현실.

새로운 시인들에 대한 주목이 거의 없다 보니 기성 스타 시인들에게만 관심이 집중된다. 평론가 최현식 씨는 “소설은 새로운 작가가 트렌드를 만들고 시장에 반향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새로운 시의 흐름이 독자에게 충격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그러다 보니 몇몇 잘 알려진 시인만 계속해서 인기를 모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시 낭송회와 시 콘서트 등 독자와 만나는 다양한 문학 행사가 많이 열리긴 하지만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드러난 시 편식 현상을 뒤집기는 쉽지 않다는 게 문단의 전망이다. 김정혜 창비 문학팀장은 “시는 이제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만한 힘을 잃은 것 같다”며 “공공도서관에서의 시집 구매 같은 공적인 뒷받침이 계속돼야 맥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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