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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책을 써라, 아니면 짐을 싸라

洪 海 里 2006. 12. 28. 06:59
책을 써라, 아니면 짐을 싸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작은 애로 사항이 하나 생겼다. 인터뷰한 미국 전문가의 프로필을 정리하면서 한국식대로 나이와 출신학교를 적어 넣곤 했는데, 어지간한 자료를 뒤져 봐서는 그걸 알아내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인터뷰 직후 직접 물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걸 다 묻네’라는 표정을 몇 번 경험한 뒤로는 인터넷에서 찾기로 작심했다.

최근 대담에 초대했던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출신 작가 제임스 만 씨에 대해서는 한때 정보검색을 포기했다. 몇 권의 저서를 남겼고, 지금은 이런저런 집필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만 줄줄이 나왔을 뿐이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미국의 신문 잡지와 TV에 나오는 전문가의 간략한 이력 표기방식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뉴욕타임스의 외부기고자는 물론 CNN방송 출연자의 소개란에도 ‘○○대 졸업, △△대 박사’라는 표현은 눈을 씻고 찾아도 안 나왔다. 현직 이외에 한 가지를 더 쓴다면 십중팔구는 최근 저서명이었다.

아마도 어떤 전문가의 학생시절 성적표보다는 오늘의 성과물을 더 중시하는 실사구시 정신이 작용한 듯하다. 중년이 된 교수들에게서도 30년 전에 다닌 학교의 랭킹을 팔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느껴졌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책꽂이에서 한국의 어느 문학상 수상집을 들춰 봤다. 출판사가 편집했겠지만, 창작세계보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보들이 작가 이력의 앞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설가 A. 1960년대 경북 출생. B대 졸업. 대학시절 학내 문학상 수상. 선진국 C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기자 역시 이런 시시콜콜한 개인사가 매우 흥미로웠고, 작가 개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이처럼 인생 초기의 성과를 끝까지 달고 사느냐, 오늘의 역량으로 평가받느냐 이외에도 워싱턴과 서울에서 느껴지는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미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호경쟁과 자기평가가 책 쓰기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대학시절 들었던 “학문 선진국일수록 대학 교수들은 ‘책(논문)을 써라. 아니면 짐을 싸든가(publish or perish)’라는 경구를 숙명처럼 품고 산다”는 말을 연상시켰다.

기자와 친분을 나누던 전문가들은 얼마간 뜸하다 싶으면 어느새 ‘새 책’을 한 권 들고 돌아왔다.

“우리 신문에서 워싱턴 정가 메모를 써 왔던 데이너 밀뱅크 기자가 새 책 저술을 위해 당분간 쉰다”는 워싱턴포스트의 안내문을 발견한 것도 올가을쯤의 일이다. 편집자로부터의 ‘압력성 격려’가 만천하에 공개된 그 기자의 저술 작업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부심 속에 진행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기자에게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를 물은 적은 없어도, 어떤 책을 썼느냐고 물었던 원로 교수 O 씨는 언젠가 이런 말을 들려 줬다.

“책을 쓴다는 것은 만인 앞에서 지적(知的)인 옷을 벗는 일이다. 내가 쓴 책을 보고 경쟁자들이 안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길만이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 교수는 알몸을 드러내는 지적 행위의 사례로 방송 출연이나, 신문 칼럼 게재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름을 얻은 전문가의 등용문은 ‘원고지 10장’으로 상징되는 신문 칼럼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다.

차분하게 책 한 권 읽기보다 10분 만에 ‘소비’가 가능한 신문 칼럼은 빨리빨리 문화에 더 적합한 소통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진국 지식인 사회의 ‘책 쓰기=자기 존재 확인’ 구조가 2006년의 한국 사회가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다가올수록, 그 10분은 짧게만 느껴진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