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우리詩』3월호 신작 소시집 / 洪海里

洪 海 里 2008. 2. 21. 18:25

<『우리詩』2008. 3월호 신작 소시집>

'시인의 말'

시야, 한잔하자!

  '신작 소시집'이란 제목이 부끄럽다.
신작이란 어떤 작품을 지칭하는 말인가? 몇 년 전에 쓴 글도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으면 신작이랄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시인詩人이 못 되었음을 오늘의 시인時人으로서 시인是認하는 일이 너무나 시인猜忍하지만 어쩔 수 없다.
  詩답지 않은 글로 시답지 않은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스스로 한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시인矢人이 될 자질이나 능력도 없다. 시인이 무엇인가. 말의 화살을 만들어 날리며 말장난이나 하는 사람인가?
  늘 뱀을 그려놓고 보면 대가리가 없다. 몸통도 없고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날개가 달린 날뱀이거나 사족四足이 붙어 있는 파충류였다. 때로는 무수하게 많은 금빛 은빛의 비늘로 덮여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 생명 없는 물체였다. 입때까지는 시에 옷을 입히려고 했으나 이제부터는 벗겨야겠다. '발가벗은 시裸詩'를 만나야겠다!
  시가詩家라 하지 않고 시인詩人이라 하는데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니 이제라도 시인들의 시속時俗이 되도록 내가 시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나의 시속時速이 얼마나 되겠는가. 시는 내 생명의 순간 순간 찰나의 절정climax이 피워내는 꽃orgasm이다. 단단한 시, 단단短短한 시랑 한잔해야겠다.
  시야, 그리고 재미 없는 글를 읽고 기꺼이 해설을 해 준 손현숙 시인에게 한잔하자고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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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북은 줄창 우네 외 5편

洪 海 里

세상의 가장 큰 북 내 몸속에 있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귀북이네

한밤이나 새벽녘 북이 절로 울 때면
나는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

봄이면 꽃이 와서 북을 깨우고
불같은 빗소리가 북채가 되어 난타공연을 하는 여름날
내 몸은 가뭇없는 황홀궁전
둥근 바람소리가 파문을 기르며 굴러가는 가을이 가면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네

너무 작거나 큰 채는 북을 울리지 못해
북은 침묵의 늪에 달로 떠오르네

늘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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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빗소리

혼례만 올리고 시댁으로 가지도 못하고
과부가 된 어린 각시,

마당에 울고 있는
겨울 빗소리

차라리 까막과부望門寡婦라면 덜할까
청상靑孀이면 더할까,

온종일 듣고 있는
겨울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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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뼈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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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여자 6


산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파르르파르르, 떠는
불같은 사랑
물 같은 사람
그리움은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이랴
수줍고 수줍어라, 그 女子.

꽃잎과 어루는 햇살도
연분홍 물이 들어 묻노니
네게도 머물고픈 물빛 시절이 있었더냐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파란 혓바닥 쏘옥 내밀고 있는
가녀리고 쓰라린, 그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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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슬픔


나무들은 꼿꼿이 서서 꿈을 꾼다
꿈에 젖은 숲은 팽팽하다

숲이 지척인데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적막에 들지 못하고
지천인 나무들에 들지 못하고

눈을 들면
푸른 게릴라들이 국지전 아닌 전면전을 감행하고 있다

녹음 아래 노금노금 가고 있는
비구니의 바구니 안
소복이 쌓이는 그늘,

그늘 속으로 이엄이엄 질탕한 놀음이 노름인 줄 모르는
한낮의
머나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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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힘

어둠이 빛인 줄 안다면
세상을 밝히는 것은 빛이 아니라
빛의 밝은 힘이 아니라
어둠의 힘이라는 걸 알게 되리
나무도
하늘 가까이 가는 것은 우듬지이지
우듬지에 별이 걸리고
별이 너를 비춰주고 있지만
결국 하늘에 가 닿는 것은
우듬지가 아니라 뿌리다
뿌리가 나무로 들어가
우듬지를 곧추세워야, 비로소
나무는 하늘에 닿는다
그러니 하늘에 닿는 것은 뿌리다
뿌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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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_ 1969년 시집『투망도投網圖』로 등단
시집『화사기花史記』『은자의 북』『난초밭 일궈 놓고』『봄, 벼락치다』『푸른 느낌표!』외 다수 있음
hongpoet@hanmail.net

<해설>

물 불 풀 벼락 그리고 시인
- 홍해리 선생님께

손 현 숙(시인)

  이 시대에 글을 쓰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생명을 거는 일은 아닐까. 가장 위험하고 가장 아스라하고 가장 남는 것이 없는, 그러니까 허공에 노를 젓는 일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많은 시인들은 무모하게도 밤을 지새우고, 일을 버리고, 심지어 사랑까지도 등지면서 시를 쓴다. 마치 죽음의 향기에 홀려서 제 목숨을 담보하는 알피니스트들처럼 시인들은 매일매일 글로써 이 세상을 창조한다. 물, 불, 풀, 벼락 그리고 사람의 숨소리까지도 문자로 모양을 세운다. 하루도 빠짐없이 온 힘을 다해 글을 쓴다. 건강과 행복을 모두 바친다. 그들은 그것이 삶이라 생각하는, 정말 이상한 족속들이다. 조건 없이 마음껏 오직 글 쓰는 일에만 자신을 바친다. 그것이 백년 후, 아니 십년 후,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도대체 그렇게 하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일까?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인의 형벌이고 또한 시인의 임무다. 그것만이 그들의 삶이다. 사람들이 믿건 믿지 않건 문학 뒤에 삶이 있다고 굳게 믿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이 땅의 희귀 족속, 우리는 그들을 시인이라 부른다. 
  여기 아침부터 밤까지 시를 먹고 입고 걷는 시인이 있다. 그는 우이동 골짜기에서 우이동 귀신이 된 지 벌써 오래다. 그를 보고 있으면 산이 마을로 내려온 듯도 싶고, 바람이 잠깐 사람의 형상으로 서 있는 것도 같다, 아니 그가 산이 되어 나무들이 메아리치는 것도 같다. 그렇게 그는 산을 참 많이 닮았다. 그는 새벽 세 시면 눈을 떠서 산의 부름을 받는다. 산은 이미 그에게 떼려야 뗄 수도 없는 정부다. 숨겨둔 여자. 사시사철 단 한 번도 같은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요부 중에서도 요부. 그는 그녀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 뭘까, 누구의 손 아귀에도 들어 본 적 없는 여자를 쥐는 힘. 산은 알고 있는 것이다. 시인만이 산을 산으로 노래하고, 걷고, 그리고 자연으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洪海里,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한다.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行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홍해리洪海里는 어디에 있는가」전문 

  홍해리 시인을 만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지자면 매우 일천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를 안다, 라고 말했을 때 모두 시간과의 상관관계를 따지기 마련이다. 하긴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일이고, 본다는 것은 그를 기억 할 필요 없이 안다는 말일 진데, 나는 그에 관해서는 개인적인 추억이 없다. 그러니까 완전히 시인으로서의 홍해리를 알 뿐. 그가 누구의 지아비인지, 누구의 스승인지, 제자인지, 그가 빨간 옷을 즐겨 입는지, 파란 양말을 싫어하는지, 여자를 넘보는지, 딱지를 맞았는지, 전혀 아는 것이 없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는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그의 전 생애를 걸고 나에게 적극 대답해 주었던 사람이다. 그렇다, 그는 시가 무슨 거대 담론이나 소수 특별한 사람들의 지적 사치가 아니고, 오로지 시인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고 느끼고 듣고, 그리하여 자신에게 이르고 또 이르러야 한다는, 이시대의 진짜 시인일 뿐이다.

세상의 가장 큰 북 내 몸속에 있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귀북이네

한밤이나 새벽녘 북이 절로 울 때면
나는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

(……)

너무 작거나 큰 채는 북을 울리지 못해
북은 침묵의 늪에 달로 떠오르네

늘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고 있네
-「귀북은 줄창 우네」부분 

  살아 있는 위대한 시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 펑크 난 양말을 깁는, 지금은 병든 내 노모의 모습을 뵌 적이 있다. 새끼들 모두 잠재워 놓고 흐린 불빛 아래서 한 땀 한 땀 양말을 깁는 모습. 이 광경이 내 가슴에는 이상하게도 서럽게, 그러나 삶의 화두처럼 남아 있다. 한 땀 한 땀 세상을 받아 적는 일. 세상의 모든 소리를 문자로 세우는 일. 종이 위에 소리를 그리는 일. 시인은 이제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모양이다. 밤낮없이 귀에서 북이 울리면 살기보다는 죽을 맛일 텐데, 보라! 시인은 세상의 가장 큰 북은 내 몸속에 있다고 말한다. 몸이 곧 우주인 사람. 스스로를 낳고 소멸시키는 우주. 몸속에 우주를 들여놓은 시인에게 더 이상 누가 감히 입을 댈 것인가. 북소리는 침묵의 늪에 달로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그를 아픔이나 늙음까지도, 혹은 소멸까지도 숨 쉬듯이 한결같이 사랑하는 이 땅의 지킴이라 부르면 어떨까.

어둠이 빛인 줄 안다면
세상을 밝히는 것은 빛이 아니라
빛의 밝은 힘이 아니라
어둠의 힘이라는 걸 알게 되리
나무도
하늘 가까이 가는 것은 우듬지이지
우듬지에 별이 걸리고
별이 너를 비춰주고 있지만
결국 하늘에 가 닿는 것은
우듬지가 아니라 뿌리다
뿌리가 나무로 들어가
우듬지를 곧추세워야, 비로소
나무는 하늘에 닿는다
그러니 하늘에 닿는 것은 뿌리다
뿌리의 힘이다.
-「어둠의 힘」전문 

  “시는 발견이다”, 라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아니 시란 한 단어 한 이미지 한 구절에서 출발한다는 시론 또한 순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시는 그런 모든 이론에 합당하다, 말 할 수 있겠다. 사람이 사람을 마침내 이해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평생을 해로한다는 부부 사이도 정말로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면서 세월을 건너가는 거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의 시 중에 「0에 대하여」라는 시가 있다. ‘텅 비어 있다 아니다 가득 차 있다// 시작이다 끝이다 영원이다’, 모든 것들은 시작 안에 끝을 담보하는 거다. 모든 끝에는 또한 시작이 담겨 있는 거다. 시인은 어둠에서 빛을 발견한다. 밤은 새벽을 잉태하고 어둠을 건너가듯이 어둠의 빛이 세상을 밝히는 거다. 나무도 하늘 가까이 안간힘으로 기어오르지만 정녕 나무가 하늘로 기어오르게 하는 힘은 세상 밖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내닫지 못하는 뿌리의 힘인 것이다. 세상이 나의 힘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모르시는 말씀! 저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엎드려 바치는 기도가 있기에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자전과 공전을 하는 것이라는데, 좋은 시란 무엇일까. 그래 성령이 담겨 있는 시면 좋은 시라 하겠다. 이렇게 어둠에서 빛을 길어 올리는 시.

산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파르르파르르, 떠는
불같은 사랑
물 같은 사람
그리움은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이랴
수줍고 수줍어라, 그 女子.

꽃잎과 어루는 햇살도
연분홍 물이 들어 묻노니
네게도 머물고픈 물빛 시절이 있었더냐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파란 혓바닥 쏘옥 내밀고 있는
가녀리고 쓰라린, 그 女子.
-「참꽃여자〮 6」전문 

  그에게도 사랑은 아직 풀지 못한 화두일까. 참꽃이 어떤 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인터넷을 뒤졌더니, ‘진달래과. 해발 1300미터 산중턱 아래 사는 낙엽관목. 꽃은 잎과 동시에 피고 선명한 주홍색으로 개화기는 5월.’ 그는 그날도 산을 걷는 중이었겠다. 때는 5월, 바람은 여리고 아마 참꽃이 고즈넉하게 피어 있었겠지. 지나간 순녀, 아니면 금녀, 누구라도 지금은 잊혀진 그 여자. 그녀가 문득 생각난 모양이다. 시인의 가슴 깊이 세 들어 살고 싶었던 그 여자. 누구나 가슴속에 비밀 하나씩은 있을 터. 비밀은 재산이라고 시인 이상은 말했다지! 비밀 하나 없는 사람하고는 말도 섞지 말라고,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웅변하듯이 말하곤 하는데. 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불같은 사랑은 또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그녀의, 혹은 그의 사랑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왜 그녀는 울고 있는 것일까. 찢어지게 꽃잎 벙그는 참꽃도 보았을 것인데, 왜 시인의 눈에는 유독 이제 막 싹을 틔우는 파란 혓바닥 쏘옥 내미는 그녀만이 눈에 들어 왔을까. 그 여자, 지금 시인의 시를 읽고 있을까. 있겠다. 
  시인의 시집『봄, 벼락 치다』중「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라는 시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를 참 좋아한다. ‘눈멀면 꽃 지고 상처도 사라지는가// 욕하지 마라 산 것들 물오른다고/ 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 허기진 가난이면 또 어떻겠느냐/ 윤이월 달 아래 벙그는 저 빈 자궁들/ 제발 죄 받을 일이라도 있어야겠다/~~~/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로 끝나는 시. 하늘의 달도 열나흘째 밤하늘의 달이 가장 아름다운 거다. 위험을 담보하는 사랑. 그것이 진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기질적으로 사랑은 위태로운 것이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비밀을 담보할 때 더욱 더 간절해지는 거다. 사랑은 변덕스럽고 잔인하고 치열할 때, 무모하지만 극적인 본능에 충실 할 수 있는 거다. 그렇게 시인은 평생 가슴에 담아둔 그녀가 있는 것일까.

나무들은 꼿꼿이 서서 꿈을 꾼다
꿈에 젖은 숲은 팽팽하다

(……)

녹음 아래 노금노금 가고 있는
비구니의 바구니 안
소복이 쌓이는 그늘,

그늘 속으로 이엄이엄 질탕한 놀음이 노름인 줄 모르는
한낮의
머나먼 슬픔.
-「머나먼 슬픔」부분 

  부도덕한 것을 향한 용기. 나는 그런 것들이 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넘지 못하는 경계 밖, 저 휘장 너머의 그림자를 향해서 질주하는 사람. 그들을 나는 시인이라 부른다. 사실 뭔가를 간절하게 원해야 실패도 있는 거다. 갖지 못할 것, 가지 못할 땅, 오르지 못할 나무, 나는 그런 것들을 꿈꾼다. 똑바로 서서 어두운 밤을 응시할 때 시인은 그곳에서 빛을 읽었던 사람이다. 나무도 꿈을 꿀 때 팽팽하다. 사람도 이루지 못할 것들을 바라볼 때 가슴이 뛸 지도 모르겠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이고’, 조지훈의 승무를 읽으면서 마음이 경건해지기를 바랐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훨씬 에로틱한 감정에 휘말려 들곤 했다. 금기의 땅, 그곳을 향한 목마름이 내겐 분명 있다. 시인에게 묻고 싶다. 당신도 그런가? 플라톤의 말대로 정말 시인은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할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비구니의 바구니 안’을 시인은 언제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았을까. 그 속에는 그늘이 소복이 쌓였다 했지만 글쎄, 시인의 눈동자가, 마음이, 욕망이 그러나 스쳐 지나가야 하는 슬픔이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혼례만 올리고 시댁으로 가지도 못하고
과부가 된 어린 각시,

마당에 울고 있는
겨울 빗소리

차라리 까막과부望門寡婦라면 덜할까
청상靑孀이면 더할까,

온종일 듣고 있는
겨울 빗소리
-「겨울 빗소리」전문 

  진정으로 위대한 시와 소설은 동화처럼 소박하고 천진한 데가 있다. 때는 겨울. 내려야 하는 눈은 오시지 않고 살픗, 따뜻한 날씨에 겨울비가 내린다.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겨울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고, 아니라 하기에는 봄은 아직 멀었다. 마당에 내리는 빗소리가 마치 과부가 된 어린 각시의 울음 같다. 시인은 어린 그녀가 몸의 맛을 모르는 차라리 까막과부이기를, 청상이기를, 그래서 그저 그것이 그냥 세상이려니, 모르면서 차라리 포기하면서 삶을 버텨주기를 바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 여기서도 저기서도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 하는 과부가 된 어린 각시의 삶.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한때가 아닌가. 그런 것들을 눈물 어리게 보면서 가슴으로 써 내려간 시. 그것이 홍해리의 시다. 가슴이 아니면 아무것도 받아 적지 못하는 이 땅의 소외자. 그는 그렇게 한 줄 아니면 두 줄의 시를 쓰기 위해 오늘도 밤을 하얗게 벼린다. 
  언젠가 시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시는 선인가, 악인가를 주제로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 생각은 선이라 주장하는 것도 무례하고 악이라 주장하는 것도 겁난다. 선을 추종하다 보면 선 아닌 다른 것을 정죄해야 하겠고, 악이라 단정 지으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가 사람을 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죽은 나무에서 싹을 틔우고 어둠 속에서 빛을 터트리는 것은 오직 시인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홍해리 시인의 시를 읽으면 캄캄했던 이 세상이 조금은 살고 싶어지기도 했던 경험,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긍정의 담론. 실제로 시인은 내게 따뜻한 선생님이시기도 하다. 몇 년 전, 누구에게도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집안의 우환으로 쫓기듯이 우이동으로 이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시인은 낯선 동네에서 당황하고 있는 나를 ‘우이시’로 인도해 주신 분이다. 그에게 시란 그렇게 이웃과 나누는 성찬이다, 그것이 그의 종교이고 기질이고 또한 이번 생의 업인 듯싶다.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물의 뼈』부분

‘거문고가 쉴 때는/ 줄을 풀어/ 절간 같지만/ 노래할 때는 팽팽하듯이// 그런 시詩!// 말의 살진 엉덩이에/ 묵언黙言의 화인火印을 찍는다/ 언어言語/ 도단道斷이다’
- 『봄, 벼락치다』의「그런 詩!」전문

  젊고 낭랑하고 뜨겁고 팽팽한 시, 그것이 홍해리의 시다. 입을 다물고 자연을 지켜보라. 꿈을 꾸라, 그러다 시간이 되면 원고지에 받아써라. 그는 그렇게 시를 완성한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조용히, 아마도 죽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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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를 잡아타고 우이동으로 봄맞이 여행을 떠나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