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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세월 담긴 억만금짜리 `붉은 風光` 속으로 /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2012. 1. 18. 20:05

 

억겁세월 담긴 억만금짜리 `붉은 風光` 속으로 / '열린 방송 MBN' MK뉴스 (2011. 10. 20.)

여행과 관광의 차이를 모른다면 여행 마니아라고 할 수 없다. 돈 들여 멋진 고생을 하는 것이 여행이라면 관광은 몸 편히 볼거리를 즐기는 호사를 가리킨다. 여행가라면 당연히 전자를 택할 것이다. 서호주 카리지니 국립공원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대상이자 목표이다. 안락한 잠자리와 혀끝을 사로잡는 성찬, 그리고 단장된 볼거리를 원하는 이에게 카리지니는 결코 추천할 곳이 못 된다. 여행이 초래할 갖은 고생을 극복한 자에게만 최고의 흥분과 절정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여름의 끝자락이 자취를 감추고 가을 기운이 완연한 10월 초 서울을 떠났다. 서호주 주도 퍼스를 통해 카리지니로 가는 여정은 멀고 길다. 매일 세 차례 싱가포르항공이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11시간여의 퍼스행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여기서 카리지니까지는 아직 자동차로 꼬박 이틀, 비행기로는 2시간여의 거리가 남아 있다.

여행가에게 번화한 도시는 험준한 모험을 떠나기 전 체력을 보강하고 작은 쾌락을 충족할 기회를 가져다준다. 서호주는 남한의 33배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다. 퍼스는 서호주 인구 200만명 가운데 80%가 살고, 그 외양만으로 보자면 유럽의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퍼스 도심 속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런던코트와 그 주변은 먼 길을 떠나려는 여행가에게 오아시스가 된다. 멋진 레스토랑엔 젊은 기운이 넘쳐나고 아기자기한 상점 진열장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호주 전역의 야생화와 희귀 나무 1만7000여 종을 모아 놓은 킹스파크 역시 꼭 방문해야 할 장소다. 백문이 불여일견은 이곳을 두고 한 말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퍼스를 관통하는 스완강에는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상상의 새로만 여겨졌던 블랙스완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니 이를 목격하는 행운을 기대해봄 직하다.

퍼스에서 차로 20~30분 거리에 있는 외항 프리맨틀은 인도양의 깊은 푸르름과 코발트빛 하늘을 배경으로 해산물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천국이다.

다음날 새벽 카리지니를 향해 길을 떠났다. 드넓은 호주 대륙을 북으로 가로질렀다. 비행기 속에 펼쳐진 붉디붉은 땅덩어리는 끝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사바나 벌판 위에 덩그렇게 가건물로 만들어진 톰 프라이스 공항에 내렸다. 남반구인 이곳의 날씨는 초봄으로 들어섰지만 바람의 기세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다시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번갈아 2시간여를 달렸다. 마침내 서울을 떠난 지 이틀 만에 카리지니 국립공원 내 에코 리트리트(Eco Retreat) 캠프에 도착했다.

붉은빛 먼지 바람이 몰아치는 사바나 벌판에 세워진 텐트 한 개를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식민지 시절 서구 탐험가들이 머물고 갔을 법한 곳이었다. 텐트 옆엔 천장이 뚫린 칸막이 화장실이 달려 있다.

낡은 세면대 위에 개구리 두 마리가 손님을 반기듯 앉아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왠지 웃음이 났다.

거친 바람이 큰 소리로 텐트에 몰아친 탓에 첫날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이른 아침 카리지니 곳곳에 펼쳐진 계곡(Gorge) 트레킹에 나섰다. 듬직한 체구와 선한 눈빛을 지닌 길잡이 피터 웨스트라는 청년을 만났다.

첫 탐험은 데일스 계곡(Dales Gorge)에서 출발했다. 70~80여 m에 달하는 가파른 비탈을 타고 내려가는 발걸음이 위태로웠지만 이내 새로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붉은 사바나 사막은 사라지고 푸른 물줄기가 계곡을 휘감았다. 족히 키가 십수 m는 됨직한 페이퍼바크(Paperbark) 나무와 방긋 미소 짓는 야생화,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지천을 이뤘다. 길잡이를 해주던 웨스트가 수만 년 전부터 내려오는 원주민들의 전설을 얘기해 줬다.

"호주 대륙이 막 생겨난 태초에 왈루(Walu)라는 거대한 뱀이 있었다. 인도양 바다를 헤치고 용솟음친 왈루는 대륙의 서쪽 땅을 가르며 마침내 북쪽 하늘로 사라졌다. 바로 그 흔적이 이 같은 깊고 웅장한 계곡을 만들었다." 태초의 인류에게 이러한 해석이 아니고서야 이 경이로운 자연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백 개 층으로 첩첩이 쌓인 계곡을 따라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이 25억년 지구 역사의 살아있는 지질박물관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계곡 끝자락엔 폭포가 흘러내리는 큼직한 연못이 있었다. 트레킹에 나섰던 젊은이들이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옷을 벗어던지고 연못을 향해 몸을 던졌다.

카리지니 국립공원에 자리 잡은 녹스 계곡을 향하는 길. 키 작은 관목과 가시덤불로 이뤄진 서호주 사바나 지형과 푸르디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몇몇은 느긋하게 계곡으로 스며드는 햇빛에 일광욕을 만끽하고 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따로 없다.

계곡을 벗어나 브루스 산으로 향했다. 지평선 끝 산자락을 넘어가는 석양이 광활한 카리지니 사바나를 물들였다. 철광석 성분이 산화해 온천지가 붉디붉어 마치 화성에라도 온 기분이다.

어둠을 뚫고 캠프로 돌아왔다. 수천 개 별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의 세례 속에서 악어와 캥거루 고기 바비큐에 로컬 와인을 곁들인 저녁은 고단한 하루를 보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침 햇살과 이름 모를 새 소리가 지난밤 추위와 거친 바람 소리에 잠을 설친 여행자를 일으켜세웠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부근에 있는 계곡을 들른 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핸콕 계곡(Hancock Gorge) 모험에 들어섰다. 단단히 각오를 해야 했다. 천길 낭떠러지다. 실수하면 끝이다.

길잡이 웨스트의 안내로 자일을 묶고 안전모를 썼다. 다리에 힘을 주고, 두 손으로 절벽의 빈틈을 찾아가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다 왔다 싶으면 좁은 바위 사이 물길이 나타났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다. 족히 50m는 됨직한 경사 50도 정도의 절벽과 급류를 내려가서야 최종 목적지인 지구의 중심(Centre of the Earth)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세 개의 협곡이 만나는 정크션 계곡(Junction Gorge)을 만나게 된다. 우기에는 지금 발을 딛고 있는 바위 위쪽으로 물이 10~20m 더 차오른다니 섬뜩했다. 뭔가를 이뤘다는 성취감이 채 가시기 전에 발길을 돌렸다.

벌써 계곡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돌아오는 오프로드 속에 모처럼 여행다운 여행을 했다는 기쁨과 끝없이 펼쳐진 벌판, 석양의 너그러운 붉은빛, 볼과 코끝을 스치는 찬바람이 시나브로 시 한 구절과 함께 막혔던 가슴을 뻥 뚫고 지나갔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가을 들녘에 서서」, (洪海里 19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