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집중조명 자료

신작시편 및 해설 : 황정산(시인)

洪 海 里 2012. 2. 23. 07:01

<신작시 5편 / 해설 : 황정산(시인)>

 

편지 외 4편

 

洪 海 里

 

 

절정에 닿기 전 내려올 줄 아는 이

그의 영혼 내 처녀처럼 아름답다고

눈물 찍어 그대에게 연필로 쓴다.

 

산에 오른다고 바랑을 메고 다니면서도

아래 너른 세상을 어찌 못 보았던가

꽃도 활짝 피면 이미 지고 있어

넋이 나간 빈집인데

나의 마음 한자락 한자락마다

고요처럼 그윽한 충만이었던가

한때는 정점이 가장 높고 너른 세상

지고의 삶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절정이란 한 점, 찰나일 뿐

위도 아래도 없고 앞도 뒤도 없다

바람 거세고 모래알 날리는 그곳

그립지 않은 것은 마음이 비어 있기 때문

사랑이란 찰나의 홀림

절정에는 이르지 말고

불타는 성전이나 구경할 일이다.

 

나의 전부인 너를 사랑한다 자연이여, 우주여

이것이 시에 대한 내 영혼의 고요 문법이라고

그대에게 띄운다.

 

 

소금과 시 

 

소금밭에 끌려온 바다가

햇볕과 바람으로 제 몸을 다 버리고 나서야

잘 여문 소금이 영롱하게 피어난다

맛의 시종인, 아니 황제인 소금의 몸에서

밀물과 썰물이 놀고 있는 소리 들린다.

 

소금을 기르는 염부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

수천수만 땀방울의 울력으로

바다의 꽃, 물의 사리인

가장 맛있는 바다의 보석이 탄생하듯이,

 

시인은 말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소금을 빚는 염부,

몇 달 몇 년이 무슨 대수냐면서

한 편의 시는 서서히 소금으로 익어간다.

  

어둔 창고 속에서 간수가 빠져나가야

달고도 짠 소금이 만들어지듯

서둘지 마라,

느긋하게 뜸을 들이며 

가슴속 언어산의 시꽃은 열매를 맺는다.

 

 

자짓빛 상상 

 

그녀는 가지를 보면 자지 생각이 난다

그러나 그녀 차지는 되지 않는다

약삭빠르고 헤픈 년들이 워낙 많아서

뒷전에서 침이나 삼키다  파지가 되고 만다

 

하지夏至면 축 늘어진 채 당당한 한때

잘생긴 가지

자줏빛으로 반짝이는 가지

갖고 싶다 따고 싶다 안고 싶다 먹고 싶다 하고 싶다

꼭지를 딸까 배꼽부터 씹을까 가운델 뭉텅 베어물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막막해지고 싶다

적막강산이 되고 싶다

 

젖가슴 풀어헤치고 다리속곳 벗어던지고

가시고기처럼 알을 슬고

바위 하나 품고 싶은

가지가지 생각에 가지나무에 목을 맬 수도 없는

그녀는 자짓빛 상상이나 하고 있다.

 

 

달을 품다 

 

 

눈이 부셔 잠을 깨니

미끈유월 스무하루

새벽 한 시

눈이 아팠다

열려진 창문으로 달이 들어와

내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고 있었다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걸어온 것이었다

단잠에 든 내 눈을 깨우고

슬몃 눈웃음을 띄고 있다

내가 못 가니

네가 왔구나

그래 나는 무작정 달빛 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하늘바다에 안긴 듯 황홀했다

향기로운 네 손에 이끌려

밤하늘 풀밭의 양 떼 모두 잠이 들고

별 몇 개만 보초인 듯 눈을 껌벅이고 있다

백중사리 지나 한가위 때나 너를 볼까 했다

노란 네 얼굴이 한층 명명청청明明淸淸해지면

그때 널 보고 싶었지만

짐짓 모른 체 할 수 없어 너를 안으니

어디선가 질척질척 고양이 우는 소리

들렸다

 

천강 만산千江萬山을 품고 있는

저 환한 고요!

 

 

 

 

봄, 날아오르다

 

 

두문불출의 겨울 적막의 문을 두드리던 바람

부드러운 칼을 숨기고 슬그머니 찾아왔다

아침 밥물을 잦히는 어머니의 손길로

물이 오르는 들판 어디선가 들려오는 칼질소리

금세 봄은 숨이 가빠 어지럽다

오색찬란 환하다, 망연자실 

바라보면 울고 싶어지는 희다 못해 푸른 매화꽃

저 구름 같은 입술 젖어 있는 걸 보라

나무들마다 아궁이에 모닥불을 지피고

지난 삼복에 장전한 총알을 발사하고 있다

봄 햇살은 금빛 은빛으로 선다

봄은 징소리가 아니라 꽹과리 소리로 온다

귀가 뚫린 것들 어디서 나타났는지

꽃집에 온 것마다 서로 팔을 걸고 마시다

목을 끌어안고 꿀을 빨고 있다

무릎에 앉은 채 껴안고 마셔라! 마셔라!

입에서 입으로 꽃술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폭탄주에 금방 까무러칠 듯 봄이 흔들리고 있다

세상에 어찌 끝이 있다 하는가

시작이 있을 뿐

겨울이 간 것이 아니라 봄이 온 것이다

파·릇·파·릇 숨통을 트고 잠시 멈추어 숨을 가다듬는

저 푸르러지는 산야로

풍찬노숙하던 환장한 봄이 날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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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해설>

 

충만과 허무 사이

 

황 정 산(시인, 문학평론가)

 

 

  우리는 모두 충만을 꿈꾸며 산다. 나의 삶이 모두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하길 바라며 그러기 위해 통장과 곳간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명예나 권력으로 그것을 대신하려 하고 그것도 힘들면 하다못해 체력이라도 빵빵하게 기르려고 한다. 삶이나 생명은 원래 뭔가를 채우려는 노력 때문에 존속되고 유지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가득 채운다는 것은 항상 불가능하다. 우리의 욕망이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채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 가진 특성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夏至면 축 늘어진 채 당당한 한때

잘생긴 가지

자줏빛으로 반짝이는 가지

갖고 싶다 따고 싶다 안고 싶다 먹고 싶다 하고 싶다

꼭지를 딸까 배꼽부터 씹을까 가운델 뭉텅 베어물까.

 

 

… (중략) …

 

젖가슴 풀어헤치고 다리속곳 벗어던지고

가시고기처럼 알을 슬고

바위 하나 품고 싶은

가지가지 생각에 가지나무에 목을 맬 수도 없는

그녀는 자짓빛 상상이나 하고 있다.

- 「자짓빛 상상」 부분

 

 

  이 시에서 ‘자짓빛’은 여러 가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남성의 성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잘 익은 가지의 색깔인 자줏빛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것은 충족하고 싶은 욕망을 나타낸다. 하지만 시적 주인공인 그녀를 충족시켜 줄 그것은 살짝 말을 바꾸어 가지로 등장하고 그것마저도 사실은 상상으로만 존재한다.

  이렇게 이 시는 충족되지 못하고 도달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재미있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충족되지 못함이 사실은 자지를 가지로 만들고 다시 가지에 대한 가지가지의 생각과 상상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 정서적 충만감을 가지게 된다. 시와 예술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 충만감을 홍해리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래 나는 무작정 달빛 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하늘바다에 안긴 듯 황홀했다

향기로운 네 손에 이끌려

밤하늘 풀밭의 양 떼 모두 잠이 들고

별 몇 개만 보초인 듯 눈을 껌벅이고 있다

백중사리 지나 한가위 때나 너를 볼까 했다

노란 네 얼굴이 한층 명명청청明明淸淸해지면

그때 널 보고 싶었지만

짐짓 모른 체 할 수 없어 너를 안으니

어디선가 질척질척 고양이 우는 소리

들렸다

 

천강 만산千江萬山을 품고 있는

저 환한 고요!

- 「달을 품다」 부분

 

 

  시인은 어느 날 달을 보고 느낀 감흥을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달은 실제 달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예술적 감흥을 안기는 모든 자연물들의 총화이기도 하다. 달을 보는 순간 시인은 고양이라는 숨어 있는 미물의 소리부터 “천강만산을 품고 있는” 고요를 동시에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이 충만감을 느끼고 깨우는 것이 바로 시심이다. 우리는 앞서도 말했듯이 자신을 채우는 행위로 자신의 욕망을 늘리고 그래서 자신을 확대해 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결핍만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 욕망 충족의 방식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 자신 앞에 놓인 충만된 세상을 인식하는 정서적 교감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홍해리 시인이 꿈꾸는 시적 충만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인고의 노력이 수반되는 일이다.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인은 말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소금을 빚는 염부,

몇 달 몇 년이 무슨 대수냐면서

한 편의 시는 서서히 소금으로 익어간다.

  

어둔 창고 속에서 간수가 빠져나가야

달고도 짠 소금이 만들어지듯

서둘지 마라,

느긋하게 뜸을 들이며 

가슴속 언어산의 시꽃은 열매를 맺는다.

- 「소금과 시」 부분

 

 

  “바다를 가슴에 품”었다고 바다를 가졌다고 할 수 없듯이 한 순간의 충만감이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바닷물을 모아 소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시인은 세상을 품어 그것의 언어를 제련해 내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가슴속 언어산의 시꽃은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더러 이 아름답지만 지난한 과정을 자신의 개인적 욕심으로 확인하려는 자들이 있다. 시를 통해 이름을 날리고 그것을 통해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홍해리 시인은 바로 그런 시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절정에 닿기 전 내려올 줄 아는 이

그의 영혼 내 처녀처럼 아름답다고

눈물 찍어 그대에게 연필로 쓴다.

 

… (중략) …

 

한때는 정점이 가장 높고 너른 세상

지고의 삶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절정이란 한 점, 찰나일 뿐

위도 아래도 없고 앞도 뒤도 없다

바람 거세고 모래알 날리는 그곳

- 「편지」 부분

 

 

  한마디로 절정은 없고 그것은 한 점이거나 찰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도달하려고 경쟁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라고 시인은 지적한다. 시는 그런 욕망의 추구와는 관계가 없고 반대로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홍해리 시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사랑이란 찰나의 홀림

절정에는 이르지 말고

불타는 성전이나 구경할 일이다.

 

나의 전부인 너를 사랑한다 자연이여, 우주여

이것이 시에 대한 내 영혼의 고요 문법이라고

그대에게 띄운다.

- 「편지」 부분

 

 

  절정에 이르러 거기에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불타는 성전”을 보는 일이다. 불타는 성전을 본다는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우상을 없애는 것이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우상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그 우상을 받들 성전을 건축한다. 시는 그것들을 없애는 데에 있지 시를 통해 그러한 우상과 성전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홍해리 시인은 자신의 시를 “고요 문법”이라고 칭하고 있다. 고요 문법이라는 것은 바로 비우는 언어일 것이다. 찰나의 성공과 한 점 티끌 같은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욕망을 걷어버릴 때 도달하는 고요함이 바로 시적 충만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을 시인은 이렇게 명명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홍해리 시인이 바라는 시는 결국 허무와 연결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어서 도달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우리의 욕망과도 비껴나는 것이다. 텅 빈 충만, 충만한 허무, 그것이 바로 홍해리 시인이 꿈꾸는 시의 세계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詩》2012.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