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집중조명 자료

<시작 노트> 난은 무엇이고 난인은 누구인가?

洪 海 里 2013. 6. 20. 05:31

 

* 테마가 있는 소시집 *

 

 

 

 

<시작 노트>

 

 

은 무엇이고 난인蘭人은 누구인가?

 

 

洪 海 里

 

 

   소리 없이 부르는 노래

   동양의 고전이여,

   움직이지 않는 춤

   초록빛 의미로

   쌓는 꿈이여!

             -졸시「난」의 일부

 

  우리는 왜 난을 기르는가?

  현대문명은 우리에게서 여유를 빼앗아 갔으며 인간성마저도 변하게 하고 말았다. 길에 나서면 하나같이 발길이 바쁘고 식당에서도 모두가 쫓기고 있는 것 같다. 난을 기른다는 것은 바로 이렇듯 바쁘고 쫓기는 가운데서도 생활의 여유를 찾고 삶의 의미를 천착해 볼 수 있는 정신적인 안식처를 마련하는데 큰 뜻이 있다. 다시 말해서 난을 가까이 함은 바로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또한 시멘트와 철근의 숲 속에서 잃어버린 자연을 되찾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일종의 자아발견이다.

  난초는 풀이다. 잡초다. 그러나 난은 사군자의 하나다. 산야에 그대로 자라고 있을 때 그것 자체는 난이 아니다. 우리가 그 난초에 인격을 부여했을 때 비로소 난이 되는 것이다.

난은 외떡잎식물 가운데 가장 큰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고도로 진화된 식물이다. 우리 인간은 가장 진화된 만물의 영장이다. 그러니 난과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서 만난다는 일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과 조건은 바로 난에게도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난은 ‘미인’이란 꽃말이 보여주듯 어느 모로 보든 미인임에 틀림없다. 잎은 잎대로 나긋나긋한 미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고 꽃의 형태나 색깔과 향기마저도 맵시 있고 우아하며 맑아서 지성미를 고루 갖춘 여인상이다. 서양에서도 난이 꽃의 여왕으로 기려 가꿔지고 있음은 난에 대한 동서양의 생각이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꽃이 없을 때는 안정 평화 이상 지성 소박 휴식을 뜻하는 녹색의 수려한 이파리가 우리의 정신적인 피로를 회복시켜 주는 치료 효과를 갖고 있다. 한편 꽃이 피면 온갖 형태의 꽃 모양과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여 흘러넘치는 맑은 향이 우리를 선경에 와 있게 한다.

  봄이 되어 모래를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힘찬 모습과 여름의 가장 더울 때 꽃대가 나와 가을 겨울을 지나고 꽃을 피우는 춘란의 인내와 끈기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한다.

 

  왜 난을 기르는가 묻지 말고 직접 난을 길러 볼 일이다. 모든 대답은 난이 직접 해 줄 것이다. 제 눈이 안경이란 말이 있지만 난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난을 찾아 주말이면 밤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부터 자생지를 답사하다 보면 난이란 식물의 신통함에 감탄을 하게 된다. 식물군 가운데서 가장 진화된 고등식물이 난이란 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과의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으로 여겨진다. 자생지의 지세를 보면 사람들이 터를 잡아 살고 싶은 명기요, 죽어서 묻히기를 원하는 명당자리이다.

  동남향 산기슭에 소나무들이 모여 살고 있어 시원한 솔바람이 지나가고 맑은 햇빛이 걸러지는 곳, 산기슭 아래로는 잔잔한 호수가 그린 듯이 펼쳐져 있는 곳, 마을에서 한가히 노니는 닭들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 그런 곳에 다소곳한 초가지붕의 곡선을 이루고 난은 살고 있다. 소나무 바늘잎 사이로 겨울이면 햇볕이 따사롭고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을 어느 정도 막아주며 호수에서 올라오는 알맞은 습도가 난을 살지게 한다.

  자생지를 답사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난은 핵가족주의를 경원한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난균을 만나 한 개의 생명체로서의 일생을 시작하면 수 십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몇 대, 아니 몇 십 대가 오순도순 정답게 대가족으로 살고 있다. 비록 한 세대의 잎의 생명이 진하면 지저분한 것을 남기지 않고 잎은 미련없이 이승을 하직한다. 똑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잎의 떨어짐에서 우리는 옛 선비들의 지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잎이 떨어지고 고구경만 남아 지나온 연륜을 자랑하며 가계의 족보를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의 비참했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난이 사는 곳은 부자흙이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자갈밭에 부엽이 쌓여 있는 가난한 집의 밭뙈기 같다. 그러나 그곳에 뿌리를 뻗고 한 집안을 이루어 사는 모습은 더 이상 다숩을 수 없이 정겹고 흐뭇하여 핵가족을 주장하는 젊은이들이 귀 기울여 들을 얘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새촉이 땅을 뚫고 솟아올라 자라나고 한여름 무더위에 솟아난 꽃봉오리가 가을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 꽃을 피우면 그 모습은 사랑 바로 그것이다. 양팔을 벌려 감싸고 보듬어 안는 듯한 꽃모양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세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군자의 마음가짐이다. 더구나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늘과 땅이 보이고 하늘에 떠 있는 투박한 사내가 땅에 있는 질박한 여인네와 사랑의 속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사랑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낸 맑고 고요하고 그윽한 사랑이지 만나자마자 불꽃을 튕기는 즉석사랑은 아니다. 난은 인간이다. 아무리 남녀평등, 여성상위 시대를 부르짖어도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난꽃은 알을 품고 있는 암컷과 하늘에 떠서 돌며 지키고 있는 수컷의 형상이다.

  난은 가장 한국적인 식물이요, 그 꽃은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와 강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만년 역사의 긴 흐름 속에 늘 외부의 침략에 당하기만 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우리 선조들의 꺾이지 않았던 얼과 그 생명력이 피워내는 꽃이다.

  난꽃은 요란하게 화장을 하지 않은 한국의 미인이다. 요즘이야 미인의 조건도 서구화하고 말았지만 난꽃은 화려한 옷으로 감싸지 않아도 그대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것보다 매력적인 것의 생명이 길지 않는가.

  삼사월 난꽃이 어우러진 남도지방의 자생지에 가서 보라. 한 무더기에 수 십대의 꽃이 솟구쳐 나와 피어 있는 광경은 마치 농악을 신명나게 연주하는 흥겨운 한판 놀이마당이다. 꽹과리 장고춤으로부터 노래란 노래, 춤이란 춤을 모두 모아 신나게 벌이고 있는 꽃잔치마당이다. 소리가 없다고 노래가 아니요, 움직임이 없다고 어찌 춤이 아니라 하랴. 소리 없고 움직임이 없어도 온 누리에 그대로 퍼지는 노래요 춤이다.

  누가 우리 난에 향이 없다고 하는가. 물론 대개는 비릿하고 밋밋한 향을 지닌 개체가 많다. 그러나 그 꽃들이 어우러졌을 때도 그렇던가? 난꽃을 모르는 이들은 초록색의 꽃이 없다고 하지만 난꽃의 주색은 녹색이다. 이파리도 녹색, 꽃도 녹색, 녹색의 보석으로 피로한 눈을 맑게 해주고 마음의 졸음을 몰아내 준다.

  현실이 답답하면 우리는 그곳을 떠나려 한다. 날개를 달고, 초록빛 날개를 달고 상상의 나라로 가자. 하늘가를 하늘하늘 날다 돌아와 호수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자.

대추꽃을 보았는가. 사철나무의 꽃을 보았는가. 초록빛의 작디작은 꽃,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꽃의 향의 맑기가 마치 난향이다. 꽃 가까이 코를 가져간다 해서 진하고 강하고 달고 탁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해서 약하고 연하고 미미하지 않다. 난향은 가까이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맑고 깨끗하기가 마찬가지다. 난이 있어서 우리는 산을 찾는다. 난이 있어서 우리는 난을 기른다. 기른다기보다 함께 사는 것이다.

  난도 식물인 만큼 우리가 난을 제대로 기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식물학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서도 난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우선 알아두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다. 난은 피자식물의 주요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 단자엽식물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물론 학자들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650 내지 750속의 25,000 내지 35,000종에 이르는 대군의 종자식물이다.

  난이 지닌 특징이 여러 가지 있으나 그중에서 몇 가지만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뿌리와 꽃과 씨라고 할 수 있다. 난의 뿌리는 수분과 영양분의 흡수기관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착생란의 경우에는 식물체를 고정시키는 역할까지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난의 뿌리는 벨라멘velamen이라 불리는 세포층으로 싸여있고 성장하고 있는 부위만이 연록색을 띠고 있다. 착생란의 경우 이 벨라멘 세포층은 공기 중에서 수분을 흡수하여 무더운 외계의 기온으로부터 뿌리를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수분이나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부분은 뿌리끝이므로 이 부위가 상처를 받게 되면 난의 성장에 대단히 해롭다. 그래서 옮겨 심을 때나 분주를 할 때 뿌리 끝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특히 주의를 해야 한다.

  자생지에서 난 뿌리의 상태를 살펴보면 딴 식물처럼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지 않고 지표를 따라 옆으로 뻗어나가며 자라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나무와 같다. 이것은 바로 뿌리의 호흡작용과 비가 왔을 때 물에 잠기지 않게 하기 위한 적응현상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분과 식재의 개발이 바로 이러한 난의 뿌리 생태에 맞춘 것이며 여기에 공간 경제가 가미된 것이다. 통기성이 좋은 분과 굵은 식재로 물빠짐이 좋고 뿌리 사이로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해서 뿌리의 호흡작용을 원활케 해줌으로써 난이 건강하게 성장토록 도와주는 것이다. 뿌리가 건강하고 실하면 만사는 해결이 되는 셈이다.

  난꽃의 기본적인 구조는 어느 종류의 난이든 모두가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 볼 때는 그 형태, 무늬, 색깔, 크기가 각양각색이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꽃으로부터 상당히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색깔도 흰색, 녹색, 황색, 분홍색, 빨강, 자주색 등 여러 가지이며 그 형태와 무늬 또한 변화무쌍하다.

  대부분의 난은 곤충 즉 나비나 벌에 의해 수정이 이루어지지만 개중에는 박쥐, 달팽이, 벌새와 같은 작은 새에 의해 수정이 되기도 하고 종류에 따라서는 자가수정이 되는 것도 있다. 수정과정은 꿀을 따러 꽃을 찾아온 곤충이나 새의 머리, 부리나 등에 꽃가루가 묻혀져 암술머리와 접촉하게 되고 암술머리에 분비된 점액질 물질에 부착되므로 수정이 이루어진다.

  꽃이 곤충을 유인하는 방법은 꿀 이외에도 짙은 향기와 호화로운 색깔을 과시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수정이 이루어지면 꽃잎은 시들고 암술머리로부터 배주로 서서히 꽃가루주머니가 부풀기 시작한다. 춘란은 수정이 되지 않으면 꽃대까지 시들어 지저분하게 남지만 한란, 소심, 일경구화나 보세 등은 꽃이 뚝 떨어져 내리고 꽃대만 남아 시들게 된다.

  수정이 된 후 난 씨가 성숙하기 까지는 종류에 따라서 다르나 4개월에서 15개월까지 걸리는데 온화한 지역의 자생란은 성숙기관이 훨씬 짧다.

  흥미로운 것은 난의 꽃의 형태가 다양한데 비해 열매의 형태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대개 세 개의 포와 럭비공이나 방망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세로로 세 개 내지 여섯 개의 기인 틈이 벌어져 열매가 터질 때가 되면 갈색으로 변한다. 난의 씨는 꽃식물계에서 가장 작지만 이런 점을 보상하기 위하여 막대한 양의 씨를 생산해 낸다. 심비디움의 경우 대개 150만 개, 캐틀레야는 500만 개의 씨를 갖고 있다. 난의 씨는 그 자체 내에 비축양분이 없고 그물 같은 씨껍질에 싸인 미세한 싹에 지나지 않으며 무게도 겨우 1/100만 그램밖에 되지 않아 기류를 타고 널리 분산될 수 있다. 그래서 호남연안에 무더기로 자생하고 있는 춘란의 씨가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올라 먼 충북의 청주 부근의 산야에까지라도 가서 운 좋게 난균을 만나면 그곳에서 일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난씨의 생존기간은 자연 상태에서 기껏 6개월밖에 되지 않으며 그 기간 내에 땅속에 있는 난균과 공생관계를 이뤄야만 발아하게 된다. 발아하는데 필요한 기간은 종류에 따라 다르나 대부분은 한 달이 지나면 실린더 모양에서 팽이 모양으로 자라나고 푸르스름한 색깔을 띠어 엽록소의 첫 발달단계를 보인다. 이어서 뿌리털 모양의 가근이 생성되고 몇 주일이 지나야 첫잎과 진짜 뿌리가 나오게 된다. 그 후 수년간 생장이 계속되어 하나의 개체로서 꽃을 피우게 된다. 난이 자연상태 하에서 발아로부터 꽃을 피우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종류마다 다르며 그 난이 처해 있는 직접적인 환경에 따라 여러 해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르다.

 

  우리가 채란을 하기 위해 자생지를 찾아다닐 때 추구하는 것은 꼭 난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활엽수의 잎이 다 떨어지고 일년생 풀들이 시들고 나서 지표를 덮고 있는 풀은 춘란뿐인 계절이 되면 난을 하는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자생란에 관심하는 이들은 병이 나기 시작한다. 주말이 가까워지면 오후나 야간열차의 차표를 예매하고 수학여행을 떠나는 어린이처럼 토요일을 꼽게 된다. 보물섬을 찾아서,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희망의 나라를 찾아서 떠나듯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고 보물을 찾는 꿈을 꾸게 된다.

  자생란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지가 불과 몇 십 년이 채 안 되는 것이 우리의 난 역사이긴 하지만 요즘의 열기는 자못 뜨거운 것이 사실이다. 자생지의 인위적인 환경의 변화로 고사하고 말 운명에 처한 귀한 난을 찾아 잘 배양하고 연구 개발하여 널리 보급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값지고 자랑스러운 일일 것인가. 다만 무지와 과욕이 문제다. 또한 배금주의에 깊이 빠져버린 이들과 자기 것을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의 얕은 정신이 문제이다.

  난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신적인 면에서 봐야 옳은 일일 듯하다. 오랫동안 꾸준히 기다리는 슬기와 인내ㅡ이것이 바로 난을 하는 사람들이면 천착해 봐야 할 점이다. 여기에 적당한 게으름ㅡ다시 말해서 여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ㅡ을 터득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회적인 삶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자신을 바로 보고 깊이 생각하여 자기를 기르고 이룩하는 최소한의 노력이 인생의 값진 보람이 아닐까. 모든 일에 경솔하고 조급해서 안달을 하며 지연과 학연과 혈연에 연연해서야 자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윤리란 윤리는 다 던져버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사람마다 욕심은 크고 마음은 급해 불확실한 내일을 바로보지 못한 채 정법을 피하고 편법에 승하다 보니 사람들이 속은 텅텅 비고 겉만 화려한 전시효과만을 노리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일시적인 눈가림과 얇고 빤한 술책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재산과 권력과 쾌락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재산과 권력과 쾌락도 시간이 지나면 끝장이 나게 된다. 우리는 파랑새를 찾고 무지개를 좇는 그 과정을 아름답게 생각한다. 기다리는 것이다. 난을 기르는 것도 그렇다.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해서 난이 빨리 자라 꽃을 피워주지는 않는다. 기다리면서 자기가 할 바를 다할 때 꽃은 피어 향을 발한다. 적어도 난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는 여유 속에 진선미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일도 난을 기르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 시는 난이다. 시인은 난인이다. 시다운 시가 난꽃을 피울 것이고 난인다운 난인이 시향을 즐기고 감상하게 될 것이다.

                                                                                               - 월간《우리詩》2013.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