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錫珉 기자 칼럼

<책갈피> 경쟁을 즐겨야 하는 이유

洪 海 里 2012. 4. 20. 07:27

경쟁을 즐겨야 하는 이유

 

이야기 하나. 몇 해 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양조업자가 희미한 웃음을 띤 채 화이트와인 두 잔을 건넸다. 시음을 했더니 묘한 느낌이었다. 같은 포도밭에서 같은 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고 했다. 둘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한쪽이 왠지 더 깊고 복합적인 맛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포도밭 한쪽에 간격을 절반으로 줄여 포도나무를 심는 실험을 해봤다고 털어놓았다. 빽빽하게 심었더니 포도나무는 물과 양분을 찾아 뿌리를 더 깊이 뻗었다. 그 덕분에 더 다양한 토양을 접하게 됐고 훨씬 뛰어난 와인이 나왔다.

이야기 둘. 미국 서북쪽 끝에 자리 잡은 워싱턴 주는 ‘에버그린 스테이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도 며칠 안 된다. 나무들은 빠른 속도로 쑥쑥 자란다. 워싱턴 주 최대 도시인 시애틀은 오래전부터 목재 집산지로 성장했다. 시애틀에서 연수하던 시절 밤새 거센 바람이 분 어느 아침에 뿌리째 뽑힌 나무들을 보고 놀랐다. 가까이 가서 봤더니 20m쯤 되는 나무의 뿌리가 불과 1m 정도밖에 안 됐다. 토네이도가 분 것도 아닌데 나무들은 맥없이 뽑혀 나갔다.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나무들이 뿌리를 깊이 박을 필요가 없다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의 저자 토드 부크홀츠는 최근작 ‘러시’에서 ‘경쟁 혐오론’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느리게 사는 삶에 대한 예찬과 동경이 만연한 사회에 경쟁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는 주장을 던진다.


책 제목인 ‘러시’는 1978년 ‘나무들’이라는 곡을 발표했던 록밴드의 이름이다. ‘나무들’의 가사는 이렇다. 숲에 뭔가 술렁거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떡갈나무가 볕을 더 많이 받는 탓에 키 작은 단풍나무가 볕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단풍나무들은 ‘탄압’이라고 외치며 서로 동맹을 맺는다. 결국 정부는 도끼와 톱을 사용해 모든 나무의 키를 똑같이 만드는 법을 통과시킨다. 부크홀츠는 “이 가사의 교훈은 경쟁을 없애는 일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역효과를 낸다는 것”이라고 적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10일 ‘2012년 미국 최고·최악의 직업’을 조사해 발표했다. 수입, 직업 전망, 업무 환경, 스트레스 등을 고려했다. 200개 직업 가운데 신문기자가 최악의 직업 5위에 올랐다. 업무 강도가 세고 스트레스가 많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기자는 경쟁이 가장 심한 직업 가운데 하나다.

기사가 나간 며칠 뒤 포브스의 제프 베르코비치 기자가 홈페이지에 반론을 올렸다. 제목은 ‘그 조사는 잊어버려라. 저널리즘이 최고의 직업인 이유’. 이 가운데 기자로서 십분 공감하는 대목이 있다. ‘스트레스는 짜릿함이다. 편집국의 기자 수십 명이 데드라인에 맞춰 특종 기사를 추적해갈 때 아드레날린이 러시를 이룬다.…나는 심장이 뛰는 직업을 택하겠다.’

나무와 인간의 상황이 같을 수는 없다. 부르고뉴의 포도나무를 더 빽빽하게 심었으면 아예 열매를 맺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시애틀의 나무가 강풍을 염두에 두고 미리 뿌리를 깊이 내릴 리도 없다. 하지만 역사는 인간 사회 역시 경쟁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구나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즐기는 게 몸에도 좋다.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동아일보 2012. 4, 20.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