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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과 오죽

洪 海 里 2012. 12. 30. 17:06

  강릉 오죽헌과 오죽

 

글·사진 / 강판권 (쥐똥나무,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오죽
오죽헌의 배롱나무(목백일홍)
문성사와 소나무
오죽헌
율곡 동상


채움과 비움의 변증법

나는 오죽을 비롯한 대나무를 보면서 삶의 방식을 깨닫는다. 벼과의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는 게 특징이다. 대나무의 이러한 속성이 중국에서는 사람의 탄생설화와 폭죽(爆竹)의 기원을 낳았다. 대나무가 비어 있는 것은 마디와 마디로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대나무의 가지는 마디에서 나온다. 마디에서 나온 가지는 마치 벼처럼 생겼다.
나는 속을 비웠기 때문에 대나무의 껍질이 매끈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단순히 비운다고 해서 피부가 매끈한 것은 아니다. 비움과 채움이 변증법적으로 잘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비움만 있거나 채움만 있으면 맑은 모습을 간직할 수 없다. 대나무로 만든 만파식적(萬波息笛)이 신비한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맑은 소리를 내는 것도 바로 채움과 비움의 절묘한 조화, 대나무가 바로 중용의 도를 실천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시인 홍해리(洪海里)도 동지섣달 눈 덮인 오죽을 보면서 비움의 철학을 읽고 있다.

오죽

동지섣달 깊은 밤
지은 소리로


석 달 열흘 내린 눈
잦힌 칠흑빛


천년을 울리고져
비우고 비운


동지섣달 긴긴 밤
숨죽인 가락. 
  -시집『푸른 느낌표!』

오죽과 정절, 충절 정신

중부 이남에서 자라는 대나무 중 오죽(烏竹)은 줄기가 까마귀처럼 검어서 붙인 이름이다. 영국의 식물학자 문로(Munro, 1818~1880)가 붙인 학명(Phyllostachys nigra Munro) 중 속명인 ‘필로스타키스(Phyllostachys)’는 그리스어로 ‘잎’을 뜻하는 ‘필론(phyllon)’과 ‘이삭’을 뜻하는 ‘스타키스(stachys)’의 합성어다. 종소명 ‘니그라(nigra)’는 ‘검은색’을 의미한다. 그러니 오죽의 학명에는 잎과 껍질의 색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오죽처럼 껍질이 검은 대나무는 일반 대나무와 달리 색다른 느낌을 준다. 대나무는 곧고 푸른 성질 때문에 정절과 충절을 상징한다. 그런데 강릉의 오죽헌은 물론 경상남도 의령군의 충익사, 삼척 죽서루 등지에서 오죽을 심은 것은 이 나무가 유달리 정절과 충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오죽처럼 검은색을 띤 무늬가 정절과 충절을 상징하는 이유는 중국 호남의 소상반죽(瀟湘斑竹) 때문이다. 중국의 소상반죽은 순임금의 두 부인인 여영과 아황이 호남의 창오(蒼梧)에서 남편의 죽음을 듣고 따라 죽으면서 생겼다. 이 과정에서 중국 여자의 정절 역사가 탄생했으며, 이런 역사는 우리나라에도 고스란히 전파되었다. 물론 오죽과 반죽은 다르다. 오죽은 나무껍질 전체가 검은 반면 반죽은 일부만 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느낌이 비슷하기 때문에 오죽을 반죽처럼 정절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죽은 뒤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얘기도 반죽과 정절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죽헌에서 만난 오죽

강릉오죽헌(江陵烏竹軒, 보물 제165호)은 건물 담 주변에 오죽이 살고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지금도 오죽헌에는 오죽이 건물을 감싸고 있고, 오죽헌 공원 입구의 중앙분리대 가로수도 오죽이다. 현재 오죽헌의 행정구역도 오죽헌을 빌린 죽헌동(竹軒洞)이다.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崔致雲, 1390∼1440)이 건립한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곳인지라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런데 오죽헌에서 신사임당과 율곡만큼 중요한 존재는 오죽이다. 오죽을 빼고 오죽헌을 말할 수 없다.
정절을 상징하는 오죽을 당호로 삼은 것은 이곳에 계시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두 분의 정신을 드러낸다. 오죽은 경내 곳곳에 살고 있지만, 오죽헌 뒤편 울타리가 제격이다. 이곳의 오죽은 굵지도 크지도 않다. 그러나 이곳 오죽의 기상은 나무의 크기와 관계없이 여느 대나무처럼 매우 높다. 더욱이 눈 덮인 오죽의 기상은 왜 선비들이 이 나무를 선호했는지, 그리고 이 나무를 왜 이곳에 심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올 삼월 오죽헌에서 눈을 맞으면서 오죽을 보았다. 나처럼 경상도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오죽헌에서 눈을 맞이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이곳 근처에 살고 있지 않으면 눈이 많이 내리면 찾아올 수조차 없고, 혹 이곳에 머물더라도 삼월에 함박눈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오죽헌에서 함박눈을 맞이했다. 그 시간은 그야말로 평생 경험하기 어려운 황홀경이었다. 이런 경험은 수십 년 만에 이곳을 찾은 자에 대한 하늘의 선물이자 오죽헌을 자주 찾아서 두 분과 오죽의 삶을 배우라는 계시일지도 모른다.
오죽헌과 세한삼우
오천원권 지폐 뒷면에 등장하는 오죽헌에는 오죽만 있는 게 아니다. 이곳에는 대나무 외에 소나무와 매화를 함께 볼 수 있다. 흔히 대나무, 소나무, 매화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부른다. 이는 추운 날씨에 벗 삼을 만한 존재라는 뜻이다. 오죽헌의 세한삼우는 이곳의 주인공들이 추구한 정신을 담고 있다. 성리학자들은 삼라만상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았다. 세한삼우를 이곳에 심은 것도 바로 공부를 위한 것이었다.
세한삼우 중 소나무는 문성사 왼편에 살고 있다. 이곳의 소나무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의 전형이다. 축 처진 가지는 율곡 이이 선생을 모신 문성사를 향하고 있다. 눈을 맞이한 소나무는 무척 춥다. 간혹 소나무는 눈을 무서워한다. 가지에 눈이 많이 쌓이면 부러지기 때문이다. 때론 눈에 부러진 가지가 한 나무의 몸집을 가볍게 하거나 긴장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낙락장송의 가지가 눈 때문에 부러지면 이곳의 정취는 매우 줄어들 것이다.
매화는 오죽헌 입구 왼편 담 쪽에 살고 있다. 이곳의 매화를 ‘율곡매(栗谷梅, 천연기념물 제484호)’라 부른다. 율곡의 정신을 담은 매화라는 뜻이리라. 600년 세월 동안 꿋꿋하게 버티어온 매화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은 당연하다. 내가 찾았을 때는 올해 봄철 기온이 낮았던 탓에 꽃이 피지 않아 설중매를 감상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눈을 품은 매화의 자태는 선승처럼 곧았고, 학처럼 고고했다. 특히 담 넘어서 보는 매화의 자태는 세월을 잊은 듯 당당했다.

오죽헌의 배롱나무

오죽헌의 또 다른 주인공은 부처꽃과의 배롱나무다. 오죽헌 입구 오른편의 배롱나무도 매화처럼 600년 세월을 꼿꼿하게 두 분의 정신을 지켜주고 있는 나무다. 겉과 속이 같아서 사당에 빠짐없이 심는 배롱나무지만, 이곳의 배롱나무는 북방한계선의 최고 수령이라서 더욱 각별하다. 붉은빛을 띤 오죽헌의 배롱나무는 늠름한 장군의 모습을 닮았다.
잎이 돋지 않은 배롱나무는 눈이 내려도 몸에 거의 눈이 쌓이지 않는다. 워낙 피부가 매끈한지라 눈이 쌓일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 내린 오죽헌의 배롱나무는 세한삼우만큼 당당하다. 나는 한 번도 이곳 배롱나무의 꽃을 직접 본 적 없다. 만약 오죽헌의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뜰 안이 매우 밝아 찾는 사람들이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곳 한 그루 배롱나무 꽃만으로도 오죽헌 담 넘어 넓은 공원의 밤을 낮처럼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오죽헌과 조영

몇 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율곡의 무덤을 찾았다. 그의 무덤 옆에는 그를 배향한 자운서원(紫雲書院)이 있다. 아직도 서원 안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의 위용을 잊을 수 없다. 율곡은 나무만큼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오죽헌이 위치한 큰 규모의 공원만 보더라도 그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헌처럼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서 오죽을 비롯해 연륜과 기상을 함께 갖춘 나무가 살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이런 점에서 오죽헌은 한국 조영 연구에도 매우 매력적인 공간이다. 오죽헌은 한국적 조영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율곡과 신사임당을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오죽헌 주변을 거대한 공원으로 만든 점이다. 넓은 공원과 박물관은 관광객 유치에 필요한 작업이었을지라도, 오죽헌의 조영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오죽헌은 성리학의 정신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경내에는 성리학자들이 담고 싶었던 오죽과 세한삼우가 살고 있다. 건물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앞의 넓은 공원은 성리학자들이 추구했던 공간이 아니다. 앞의 넓은 공원은 아름다운 오죽헌을 반감시킨다. 구태여 공원이 필요했더라도 오죽헌 앞을 고즈넉한 공간으로 남겨놓았더라면 훨씬 격조 높은 문화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 조영은 실과 허의 변증법을 구현하고 있다. 이는 담 안과 밖의 조화를 의미한다. 한국 전통의 공간은 안과 밖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후손들이 안과 밖의 아름다운 조화를 추구한 선조들의 정신을 잇지 않는다면, 품위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어느 문화재든 문화재에 담긴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결코 건물은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문화재를 살아 있는 유산으로 남기려면 사람의 손때를 묻혀야 한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공간이라야 사람의 정신도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산림》2010.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