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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앓는 여자, 강성연' / 조선일보 2013. 10. 1.

洪 海 里 2013. 10. 3. 10:08

'詩를 앓는 여자, 강성연' / 조선일보 2013. 10. 1.

입력 : 2013.10.01 03:01

[2년째 EBS '시 콘서트' DJ]

어렸을 땐 말 없고 내성적… 자연스럽게 문학소녀 됐죠
청취자 사연도 한 편의 詩… 시인들이 靈感 얻어가기도

"산책은 산 책(冊)이다… 살아있는 책이다." DJ가 천천히 홍해리 시인의 시구(詩句)를 읊조린다.

지난 25일 오전 서울 우면동 EBS방송센터 제1스튜디오에서 '강성연의 시(詩) 콘서트(매주 월~토요일 오전 11시)' 진행자, 배우 강성연(37)은 설레는 듯 말했다. "가을을 심하게 앓아요. 자면서도 감성에 젖어 있거든요. 매 순간 사색에 빠지다 보니 학창 시절엔 엄마가 걱정이 많으셨죠." 고교 시절까지도 그는 말수가 적고 사람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자연히 책과 친해졌다. "말을 못하니 속에 있는 걸 종이 위에라도 꺼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어요. 연기도 문장을 상상해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니까, 제가 배우가 된 것도 어쩜 그때의 속앓이 덕분인 것 같아요."


	강성연씨가 녹음에 앞서 시집을 읽고 있다. 1주일에 시집 2권을 읽는다는 그는 “책 사면 종이 냄새부터 맡는다. 모서리 구겨지지 않게 페이지도 조심조심 넘긴다”고 했다
강성연씨가 녹음에 앞서 시집을 읽고 있다. 1주일에 시집 2권을 읽는다는 그는 “책 사면 종이 냄새부터 맡는다. 모서리 구겨지지 않게 페이지도 조심조심 넘긴다”고 했다. /허영한 기자
그녀의 끄적임은 몇 편의 시가 되기도 했다. '흙에게 나는 그랬다. 왜 이리 곱지 않냐고… 흙은 묵묵히 자신의 속내를 보여줬다.' 지난해 5월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쓴 시를 그녀는 방송에서 읽었다. "시인들에게 물어보니 속말을 시로 풀어쓰는 게 자기와의 좋은 소통 방법이라 하더라고요." 고교 시절 그는 음대에 가기 위해 성악을 배운 적이 있다. 그때 키운 성량으로, 그는 지난해 2월부터 수백 편의 시를 소리 내 읽었다. "낭독은 문장을 살게 하는 거예요. 연기나 노래와 같죠." 그는 지난 7월 첫 뮤지컬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에서도 한 달간 시인으로 살았다. "제가 연기한 김연수 수녀가 원래 시인이었대요. 제가 시랑 연이 있긴 있나 봐요."

고은·김경주·문정희·진은영 등 지금까지 68명의 쟁쟁한 시인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김이강 시인은 미모에 놀랐고, 신용목 시인은 제가 시를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다 받아주셔서 좋았어요. 이해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인생에 대해 감사하게 되죠." 시인들과 친해지자 시심(詩心)도 깊어졌다. 시와 시인 공부에 도움을 줘 이 방송 '고문(顧問)'으로 불리는 손택수 시인과 친분으로 강씨는 10월 19일 열리는 노작문학상 시상식 사회도 맡기로 했다. 그는 "방송을 진행하면서 시인은 폐쇄적일 거라는 편견을 많이 깼다"고 말했다. 8월 27일부터는 SNS 시인으로 유명한 하상욱씨가 수요일 고정 게스트로 합류했다. 강씨는 "어렵고 난해한 지적 허영이 아닌, 시와 대중 간 거리 좁히기가 방송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방송의 또 다른 중추는 바로 청취자다. "지난 16일 방송 주제가 '물들다'였어요. 김치를 썰 때 도마에 배는 엷은 김치 국물에 인생을 비유한 주부도 있었고, 아이의 볼에서 해맑게 번져가는 홍조를 통해 행복을 노래한 분도 있었죠. 사연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예요. 오죽하면 시인들도 여기서 오히려 영감을 얻어간다고 하겠어요." 이런 수많은 시상(詩想)에 힘입어 이 프로는 지난 3월, 제25회 '한국 PD대상' 라디오 시사·교양·드라마 부문 수상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지난해 1월 동갑내기 재즈피아니스트 김가온씨와 결혼한 그는 "낭독은 나이 들어서도 하고 싶어요. 시와 인생은 같이 가는 거니까"라고 말했다.

 산책 / 洪 海 里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시집『독종』(2013, 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