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가곡·문화글판·기타

무위無爲의 여유

洪 海 里 2015. 10. 11. 13:57
ywlee
토론토 한인사회의 종합시사전문지 <부동산캐나다>는 지난 2003년 5월 1일, 주로 한인사회의 부동산 및 경제 뉴스를 다루는 부동산경제 전문지로 창간됐습니다...동포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라며, 기사제보 환영합니다....

www.budongsancanada.com
전화: 416-449-7600
無爲의 여유
ywlee

 

수년 전만 해도 여름 휴가철엔 가족.친지들과 함께 호숫가나 주립공원에서 밤샘 캠핑을 즐기곤 했으나 이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이 귀찮아졌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모닥불을 피우는 캠핑의 낭만과 즐거움보다는 짐을 꾸리고 야외에서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는 것들이 성가시게만 여겨진다.


한때는 이글거리는 한여름 태양이 청춘의 낭만과 상징처럼 불타 보이기도 했으나 이젠 비지땀을 쏟으며 햇볕 속을 걷는 것이 고역으로만 여겨진다. 휴가지를 오가며 도로의 차량이 정체현상이라도 빚으면 이건 휴식이 아니라 되레 스트레스만 받게 된다. 이 모든 현상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이리라.


올해도 지난 7월 마지막 한주는 신문사 전체가 휴가를 실시했으나 나는 딱히 어디를 목적지로 정해서 가기보다는 당일치기로, 또는 이틀 정도 가족들과 함께 차로 왔다 갔다 하며 일상에서 벗어나 고단했던 심신을 잠시나마 쉬어보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다 보니 병원에서 약사 인턴코스를 밟고 있는 큰딸을 만나보러 1박2일간 오타와를 다녀온 것 외에는 특별한 스케줄이 없었다.


사실 휴가란 것이 그렇다. 평소 먹고 사느라 번잡하고 쫓기는 일상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와 가족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업무에서 벗어나는 자체가 바로 정신적으로 편안해지는 것이다. 해서 나는 휴가기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가 않고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다. 한마디로 머리를 텅 비우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의 휴가방식은 무위(無爲), 즉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도 안보고 이메일도 열어보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당분간은 일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무위(無爲)란 것이 말은 쉬워도 실제로 결행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일상에서 철저히 벗어나고 싶어도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경우, 휴가 이튿날부터 신문사의 웹사이트가 작동이 중단돼 사방에서 어찌된 거냐며 문의전화가 들어왔다. 이에 따라 부랴부랴 웹사이트 관리 회사는 물론, 휴가중인 직원들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조처를 당부해야 했다. 이러니 회사일을 완전히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특히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을 직원들에게 업무문제로 교신을 하자니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웹사이트가 작동되기 시작하니 그나마 한시름 놓게 됐으나, 이번엔 내가 휴가란 사실을 아는 지인들이 골프라도 치자는 둥, 모임에 나오라는 둥, 계속해서 전화기가 울려댔다. 휴가기간은 이메일 체크도 안하려 했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이메일 속에는 각종 단체에서 보내온 소식이 가득했고, 신경 쓸 일도 여전했다. 이래서 나의 휴가목표인 무위(無爲)는 그야말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나마 마지막 이틀 정도는 정말로 아무 일도, 생각도 하지 않고 완전히 무위의 세계에 잠겨보았는데 그 맛이 참 달콤하고 행복했다.


무위, 참 좋은 말이다. 무위는 자칫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는 뜻으로 알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 일도 않고 밥만 축낸다는 뜻의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이 많이 쓰이다 보니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무위란 말에는 심오한 뜻이 들어 있다.


무위는 고대 중국의 노자, 장자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행동원리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행위, 이기적인 행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고 이치에 합당하게 행동하기에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한마디로 억지로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자 철학에서 가장 중추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은 “꾸미거나 속이거나 순리에 맞지 않게 억지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노자의 경전인 도덕경에는 無爲라는 단어가 수많이 등장한다. 특히 爲라는 한자를 거짓(僞)의 의미로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천하가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위미(爲美-꾸며진 아름다움)라면 이것은 오(惡-추함)요, 천하가 다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위선(爲善-꾸며진 선)이라면 이는 불선(不善)”이라 했다.


무위의 가장 표상적인 것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무리없이, 합리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물(水)이 바로 그러하다.


너는 늘 가득 차 있어/네 앞에 서면 나는 비어 있을 뿐…/너는 언제나 무위(無爲)의 시(詩)/무위의 춤/무위의 노래/나의 언어로 쌓을 수 없는 성/한밤이면 너는 수묵빛 사색의 이마가 별처럼 빛나/나는 초록빛 희망이라고/초록빛 사랑이라고/초록빛 슬픔이라고 쓴다//새벽이 오면 상처 속에서도 사랑은 푸르리니/자연이여 칠흑 속에 박힌 그리움이여/화성의 처녀궁에서 오는 무위의 소식/푸른 파도로 파도를 밀면서 오네. (홍해리 ‘인위(人爲)와 무위(無爲)의 시’)


비워야 다시 채워지는 것이 세상사 이치다. 가끔은 각박한 현실의 아집과 집착에서 벗어나 머리를 비우는 것도 소중한 의미가 있다. 아무 일도, 생각도 않고 쉬어가는 잠시나마의 여유야말로 영육간 재충전을 위한 귀중한 시간이다. 따라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사람에겐 가급적 번잡한 연락을 하지 말자.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