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닷물이 모든 밝음을 빨아들이고 나면
물에 녹아버릴 하얀 글씨를 모래에 써 봅니다.
잊는다 못 잊는다 온전히 사랑한다.
햇빛 비추고 모래가 하얘지면 지워질 시를
새하얀 글씨로 허무하게 허무하게 흘려봅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글=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시: 조지훈 ‘민들레꽃’.(동아일보 2018. 12. 6.)
그리움을 위하여
洪 海 里
서로 스쳐 지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너를
보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너를
허망한 이 거리에서
이 모래틈에서
창백한 이마를 날리고 섰는 너를 위하여,
그림자도 없이 흔들리며 돌아오는 오늘 밤은 시를 쓸 것
만 같다 어두운 밤을 몇몇이 어우러져 막소주 몇 잔에 서
대문 네거리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두둥럿이 떠오른 저
달도 하늘의 술잔에 젖었는지 뿌연 달무리를 안고 있다
잠들기 전에 잠들기 전에 이 허전한 가슴으로 피가 도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네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린 벌써 박살을 냈다.
아득한 나의 목소리
아득한 너의 목소리
아득한 우리 목소리.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썩은 사과 냄새에 취해
나는 내 그림자도 잃고 헤매임이여.
흙벽에 등을 대고 듣던
새벽녘 선한 공기를 찍는 까치소리
한낮 솔숲의 뻐꾸기 울음
그믐밤 칠흑빛 소쩍새 울음.
보리푸름 위 종달새 밝은 봄빛과
삘기풀 찔레꽃의 평활 위하여
이 묵은 시간 거리의 떠남을 위하여.
- 시집『우리들의 말』(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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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질 글씨
검은 바닷물이 모든 밝음을 빨아들이고 나면
물에 녹아버릴 하얀 글씨를 모래에 써 봅니다.
잊는다 못 잊는다 온전히 사랑한다.
햇빛 비추고 모래가 하얘지면 지워질 시를
새하얀 글씨로 허무하게 허무하게 흘려봅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사진=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글=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시: 조지훈 ‘민들레꽃’.(동아일보 2018.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