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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선집『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김창집(작가)

洪 海 里 2019. 6. 11. 03:30


개망초꽃 추억

 

막걸리 한잔에 가슴 따숩던

어둡고 춥던 육십년대

술 마셔 주고 안주 비우는 일로

밥벌이하던 적이 있었지

서문동 골목길의 막걸릿집

인심 좋고 몸피 푸짐한 뚱띵이 주모

만나다 보면 정이 든다고

자그맣고 음전하던 심한 사투리

경상도 계집애

좋아한다 말은 못하고

좋아하는 꽃이 뭐냐고 묻던

그냥 그냥 말만 해 달라더니

금빛 목걸이를 달아주고 달아난

얼굴이 하얗던 계집애

가버린 반생이 뜬세상 뜬정이라고

아무데서나 구름처럼 피어나는

서럽고 치사스런 정분이

집 나간 며느리 대신

손자들 달걀 프라이나 부치고 있는가

지상에 뿌려진 개망초 꽃구름

시월 들판에도 푸르게 피어나네.

 

     -황금감옥(2008, 우리글)

    

 

 

둥근잎나팔꽃

 

아침에 피는 꽃은 누가 보고 싶어 피는가

홍자색 꽃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고

가는 허리에 매달려 한나절을 기어오르다

어슴새벽부터 푸른 심장 뛰는 소리,

헐떡이며 몇 백 리를 가면

너의 첫 입술에 온몸이 녹을 듯, 허나,

하릴없다 하릴없다 유성으로 지는 꽃잎들

그림자만 밟아도 슬픔으로 무너질까

다가가기도 마음 겨워 눈물이 나서

너에게 가는 영혼마저 지워 버리노라면

억장 무너지는 일 어디 하나 둘이랴만

꽃 속 천 리 해는 지고

타는 들길을 홀로 가는 사내

천년의 고독을 안고,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언뜻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 벼락치다(2006, 우리글)    


 

 

무화과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아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 뜬 사내 하나 있다.

 

     -, 벼락치다(2006, 우리글) 



산수유 그 여자

 

눈부신 금빛으로 피어나는

누이야,

네가 그리워 봄은 왔다

 

저 하늘로부터

이 땅까지

푸르름이 짙어 어질머리 나고

 

대지가 시들시들 시들마를 때

너의 사랑은 빨갛게 익어

조롱조롱 매달렸나니

 

흰 눈이 온통 여백으로 빛나는

한겨울, 너는

늙으신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

 

아아,

머지않아 봄은 또 오것다.

 

   -황금감옥(2008, 우리글    


 

 

상사화相思花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자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석류石榴

 

줄 듯

줄 듯

 

입맛만 다시게 하고

주지 않는

 

겉멋만 들어

화려하고

 

가득한 듯

텅 빈

 

먹음직하나

침만 고이게 하는

 

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

 

입술 뾰족 내밀고 있는.

 

     -황금감옥(2008, 우리글)     


 

황금감옥黃金監獄


나른한 봄날

코피 터진다


꺽정이 같은 놈

황금감옥에 갇혀 있다

금빛 도포를 입고

벙어리뻐꾸기 울듯, 후훗후훗

호박벌 파락파락 날개를 친다

꺽정이란 놈이 이 집 저 집 휘젓고 다녀야

풍년 든다

언제

눈감아도 환하고

신명나게 춤추던 세상 한 번 있었던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못생긴 여자라 욕하지 마라

티끌세상 무슨 한이 있다고

시집 못간 처녀들

배꼽 물러 떨어지고 말면 어쩌라고

 

시비柴扉 걸지 마라

꺽정이가 날아야

호박 같은 세상 둥글둥글 굴러간다

 

황금감옥은 네 속에 있다.

 

     -황금감옥(2008, 우리글)  


  


소심 개화素心開花

 

한가을 둥근달

맑은 빛살로

바느질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밤 도와 마름하여

 

첫날밤 지샌

새댁

정화수

앞에 놓고

두 손 모으다

 

바람도 자는데

바르르

떠는

하늘빛 고운 울음

영원 같은 거

 

엷은 고요

무봉천의 한 자락

홀로 맑은 

지상의 한뼘 자리

젖빛 향기 속

선녀 하강하다.

 

      -은자의 북(1992, 작가정신)

      

            *홍해리 시선집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도서출판 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