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고수高手의 시 쓰는 법 / 임채우(시인 · 문학평론가)

洪 海 里 2020. 2. 19. 19:36

고수高手의 시 쓰는 법

  ―홍해리 시인의 시 「정곡론正鵠論

 

   임 채 우(시인 · 문학평론가)

 

  홍해리 시인께서 스물 몇 번째 시집 『정곡론正鵠論을 발간하였다. 이 시집은 그간 삶의 질곡에서 조금도 틈새가 보이지 않던 ‘치매행致梅行’ 연작에서 벗어나 그의 수준 높은 시와 만나는 기쁨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그는 이 시집의 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지난 수년 전의 작품부터 미발표 최신작을 망라했다. 생각해 보면 50여 년 시를 써 왔는데 아직도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이 시집은 나의 평생 화두,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방황과 모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시를 반백 년이나 써온 분의 말씀치고는 일견 소박하나 단순한 겸사로만 들리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방황과 모색은 삶의 근원적인 방황과 모색이다. 인생 80에 시력詩歷 50년이 의미하는 바가 왜 없겠는가. 삶의 근본적인 화두는 답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비중이 쏠리는 법이다.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더는 시를 쓰지 못하리라.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아등바등하며 삶을 연장할 필요가 없으리라. 정답을 아는 사람에게는 삶의 방황과 모색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진솔한 기념사는 참석한 후배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기보다는 오히려 시 쓰기의 치열함으로 새겨 들린다.

  이 시집의 표제작 「정곡론正鵠論」을 통해 그가 말하는 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자.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

귀로 보지요

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

그렇다

눈이 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

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

못 듣던 것도 들린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

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빼어난 시안詩眼이다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이 시는 뜬금없이 앞 못 보는 칼갈이 사내를 전반부에 내세운다. 보은 회인에서 만난 칼갈이 사내에게 앞을 못 보는데 어떻게 칼을 가느냐고 묻자,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귀로 보고 손으로 보며 칼을 간다고 말한다. 실로 『莊子』에나 나옴 직한 인물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달인達人이라 부른다. 화자는 이 달인의 작업을 보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렇다”라고 시인하며 자기 작업을 이야기한다. 시를 쓰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으로 보며, 시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시안을 붙잡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 감각으로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언어를 세운다고 한다.  

 

  대개 무슨 일을 하든지 한 분야에 통달한 사람들은 그 경계의 넘나듦이 자유로워 회인의 칼갈이와 시인인 화자는 동급으로 보인다. 칼갈이와 시인은 대략 몇 가지 공통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둘 다 ‘앞못보는’(띄어 쓰지 않은 점을 유의할 것) 사람이다. 실제로 봉사일 수도 있지만, 자기 일밖에 모르는 세상 물정 어두운 사람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둘째는, 둘 다 손으로 작업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칼갈이는 칼날을 벼리고, 시인은 언어를 벼린다. 수사적으로 칼갈이 사내는 시인의 은유적 표현이다.

  세칭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고수高手’라 한다. 옛 수공업 시절, 대개 몸으로 하는 직업에 접미사 ‘수’를 붙여 그들이 하는 일을 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목수, 가수, 운전수, 도편수, 판수, 포수 등등. 장사하는 사람을 ‘장수’라고 하는 것도 그들이 하는 일을 천하게 여겼으며, 손으로 작업하여 몸이 고달픈 사람들의 직업쯤으로 해석된다. 다분히 사농공상이란 조선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말이다. 왜 하필이면 ‘수’ 자인가에 대해서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분야의 숙련된 고수들은 그들의 작업이 눈과 귀라는 일차적인 감각이나 이성적인 판단과 추측에 의해서 하기보다는 다년간 숙달된 경험이 몸에 배어 눈을 감고도 귀를 막고도 손놀림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으니 그저 몸 감각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莊子』에는 도의 경지에 이른, 손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養生主」 편에 보면, 소를 잡는 백정 ‘포정庖丁’이 등장한다. 그가 소를 풀어내는데, “손이 닿는 것과 어깨에 기대는 것과 발이 밟는 것과 무릎이 버틸 때 소가죽과 뼈가 갈라지면서 샹 하며, 칼을 밀어 넣을 때 훅 하며, 음악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탕 임금 때 악곡인 「상림」에 맞추어 추는 춤과 부합하며, 경수의 음절에도 들어맞았다.”라고 했다. 문혜군이 그를 칭찬하며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느냐고 묻자, 포정이 답한다.

  “소를 (처음) 풀어낼 때는 온통 소만 보였습니다. 삼 년 뒤에는 소의 몸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신명神明으로 만나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과 지각 작용이 멈춰지고 신명이 움직이려 함에 소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 힘줄과 뼈 사이를 치고 골절 사이의 빈 곳으로 칼을 집어넣습니다. 소의 본래 그러한 구조를 따르는지라 경락이 서로 이어진 곳과 뼈 사이의 살과 힘줄이 엉킨 곳조차 거리끼지 않거늘 하물며 뼈이겠습니까!

  포정의 말에 유의할 점은, 삼 년 뒤에는 소의 몸체는 보이지 않고, 감각(일차적 감각)과 지각 작용(이성적 판단과 추측)이 멈춰지고, 신명을 부려, 소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 칼날을 놀리는데, 힘줄과 뼈 사이, 골절 사이의 빈 곳(핵심, 급소, 정곡)으로 칼날을 디미니 소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작업의 비밀인가. 그러기에 그는 칼을 한 번 갈아 십구 년을 사용했는데도 숫돌에 방금 갈아낸 듯하다고 했다. 실로 도통한 고수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이왕지사 『莊子』를 들먹였으니 한 인물을 더 보기로 하자. 이번에는 「天道」 편에 나오는 수레바퀴를 깎는 ‘윤편’의 일화이다.

  춘추전국 시대 패권 주였던 제나라 환공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마침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하찮은 윤편이란 자가 대뜸 말을 걸어온다. 지금 임금께서 보고 있는 책이 ‘조박糟粕(술을 거르고 난 지게미)이라는 것이다. 아마 목을 내놓고 작심 발언을 한 것 같다. 감히 임금이 읽고 있는 성현의 말씀을 술지게미라고 표현하고, 지금 당신의 독서는 술지게미를 맛보는 행위라고 일컬었으니. 이렇게 당당하게 시비를 건 연유에 대해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저의 일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수레바퀴를 깎는 것은 천천히 하면 느슨하여 단단하지 않고, 빠르게 하면 매끄럽지 않아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정도는 손에 익어서 마음먹은 대로 되는 지라 입으로 말할 수 없고 그사이에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 아들에게 가르쳐줄 수 없고, 제 아들은 그것을 전수받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나이 칠십에 늙도록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그가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군주께서 읽는 것은 옛사람의 술지게미일 뿐입니다.

  윤편은 자기 일을 통해 무엇을 터득했는가. 수레바퀴를 깎는 작업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중도中道의 묘에 있으며, 이 도는 손에 익어 마음대로 되는 것 가운데 수(핵심, 정곡)가 있으며, 이것을 입으로 말하여 전할 수가 없기에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철학서, 사상서, 시론 등은 모두 술지게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시 「정곡론」은 시업詩業 50년의 한 고수가 전하는 시 쓰는 법이다. ‘정곡正鵠’이란 바를 정, 과녁 곡으로 활쏘기의 과녁 한가운데, 표적의 정중앙을 정확히 맞추다, 핵심을 찌르다, 시적으로 말하자면 시안詩眼을 붙잡는다는 말이 되겠고, ‘론자를 붙여 과녁을 맞히는 법, 시의 핵심인 시안을 붙잡는 법에 대한 방법(노하우)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왜 과녁을 정곡이라 했는지에 대해서는, 시인의 권외 설명에 의하면, 은 원래 솔개를 뜻하고, 은 고니를 말하는데, 화살로 날고 있는 솔개와 고니를 맞히기는 심히 어렵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그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아직 살피지 못했다. 다만 『주례周禮의 천관天官 사구司裘의 주 따르면, “과녁에서 사방 열 자 되는 것을 후라 하고, 넉자 되는 것을 곡이라 하고, 두 자 되는 것을 정이라 하고, 네 치 되는 것을 질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정곡’이란 시안을 말하며, ‘정곡을 찌른다’는 시안을 붙듦을 말하며, ‘정곡론’이란 시안을 붙드는 법, 곧 ‘시론 아닌 시론’이 되겠다.

  그의 시에 준해서 말하자면, 시작詩作은 화살이 사대를 떠나 정확히 과녁에 꽂히는 것인데, 그것을 눈과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몸에 익은 자신만의 터득한 방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공부하는 사람이 남의 시를 열심히 읽고, 그들이 남긴 시론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은 과연 헛된 일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포정의 말처럼 그들의 작업은 일차적인 감각도 아니고 지각 작용도 아니며 몸에 붙은 신명으로 할 뿐이며, 그들이 남긴 것은 윤편의 말처럼 조박이니, 이것에는 시의 정곡이 없지 않은가. 시의 정곡은 결코 말로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심히 활 쏘는 법을 보거나 듣거나 읽어서 마침내 사대射臺에 올라 80보 밖의 과녁을 겨냥한다. 처음에는 시위를 당기기도 버겁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도 못 미쳐 땅바닥에 떨어지고, 이윽고 과녁 너머로 날아가기도 하고, 그 언저리에 꽂히기도 한다. 그러기를 하 세월, 마침내 과녁 한복판에 5 5하면 사대 아래 기생들이 “지화자” 소리를 하며 명궁 반열에 올랐다고 칭찬한다. 거기까지는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면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거와 같다. 강을 건넌 나그네는 나룻배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유유히 가듯이, 진정한 고수는 그저 무소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고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도 화살을 날려 어김없이 과녁에 적중할 것이고, 과녁 없는 과녁에 화살을 날려도 정곡을 찌르지 못한 바가 없다. , 실로 아득한 시의 경지여, 멀고 먼 시인의 길이여!


- 월간《우리詩》2020.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