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는 詩
洪 海 里
이슥한 밤
정성스레 연필을 깎을 때
창밖에 눈 내리는 소리
연필을 꼭꼭 눌러 시를 쓰면
눈길을 밟고 다가오는
정갈한 영혼 하나
하늘이 뿌리는 사리 같은 눈
발바닥으로 문신을 박듯
사각사각 사각사각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어느새 희번하니 동이 트고
냉수 한 대접의 새벽녘
드디어,
하얀 종이 위에 현신하는
눈매 서늘한 한 편의 詩.
- 월간《우리詩》2019. 12월호.
<감상>
눈이 내려야 하네. 국꾹 눌러 적은 마음 그 발길에 놓여야 하니.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창문에 닿아야 하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필사한 그리움의 거리를 이어야 하니.
백지로 덮인 마을에 사는 우리는 육필의 고백으로 만나야지.
연필로 적으면 정갈한 몸 그대로 내어주는 것 같아. 때 묻은
생각 다 덜어지고 알뜰한 말 한마디 남을 것 같아.
이제 세상 이목의 눈을 닫네. 한결같은 필체를 보이려고 옷을
벗고 냉수 한 대접으로 새벽을 씻네. 나를 새기는지 당신을
새기는지 알 수 없이, 연필로 엎드리는 일 경건하네.
-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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