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촐촐하다 : 홍해리 / 이동훈(시인)

洪 海 里 2022. 8. 22. 12:31

촐촐하다

 

홍 해 리

 

깊은 겨울밤

잠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누가

술상이라도 보는가

 

생각은 벌써

술잔에서 촐촐 넘치고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곁엔 잠에 빠진 아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 『마음이 지워지다』, 놀북, 2021.

 

<감상>

홍해리 시인은 치매에 이른 아내를 옆에서 돌보면서, 일종의 간병기(看病記)와 같은 421편의 시를 네 권의 시집으로 묶어서 출간한 바 있다. 홍해리 시인에게 시 쓰는 일은 평생을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해온 일이기도 했지만, 치매행 관련 시집은 치매 가족이나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한 땀 한 땀 깁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육필 시다.

『마음이 지워지다』는 기존의 네 권 시집에서 출판사 놀북이 가려 뽑은 11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슬픔을 슬픔으로 치유하는, 슬픔에 잘 듣는 응급처방시(詩)란 뒤표지 광고문구가 시집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 「촐촐하다」는 표면상으론 슬픔의 무게나 색조를 살짝 덜어낸 느낌을 주면서 술술 잘 읽히는 시다. “촐촐”이란 어감에서 뭔가 조금씩 넘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데, 시인은 얄궂게도 술을 생각하고 입맛이 도는 모습이다. 막걸리를 밥으로 여기고, 풋고추 날된장에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홍해리 시인의 일면을 그려보는 사람이라면 슬며시 웃음도 짓게 되는 장면이지만 편하게 웃을 순 없다. 정신을 놓고 몸이 아픈 아내가 시인의 팔베개에 겨우 잠들어 있을 테니 말이다. 가벼운 술상조차 꿈이 된 게 시인이 마주한 현실이란 걸 알아차린다면 더욱 그렇다.

젊은 날, 난(蘭)과 시와 술에 집중하는 사이 아내를 혼자 둔 적이 많았다는 시인은 아내가 아프기 시작한 십여 년 전부터 바깥출입을 최소화해오고 환후가 깊었을 때는 옆을 지켰다. 어떤 인생이든 자기 뜻대로 살아지는 경우는 없다. 주변에 아픈 사람이 생기거나 예상치 못한 그늘이 드리울 때 그 슬픔의 무게나 누적되어 오는 피로도란 것은 상상 이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그렇게 두더라도 「촐촐하다」에서 보여준 시인의 태도처럼 짐짓 엉뚱한 상상 혹은 딴 생각으로 촐촐 넘치는 마음결을 슬며시 보일 수 있다면 어떨까. 삶은 좀 더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으로 촐촐한 저녁을 맞는다.

- 이동훈(시인).

 

 

19세기 미국의 대중적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서도 뛰어난 감성으로 멋진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불행한 일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으며, 두 번째 아내는 집에 화재가 발생해 화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롱펠로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는데, 어느 날 임종을 앞둔 롱펠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숱한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를 남길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이 궁금합니다." 롱펠로는 정원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과나무가 바로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사과나무는 보는 것처럼 수령이 오래된 고목인데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항상 새로운 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