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

洪 海 里 2023. 4. 3. 08:19

 

홍해리 시인의 치매행致梅行 4시집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가 출간되었다.

이로써 홍 시인은 치매행이란 이름의

사부곡思婦曲’ 421편을 쓰기에 이르렀다.

병석의 아내를 향해 내쏟는 절절한 사랑의

노래를 이렇게 많이 토해낸 시인은 일찍이 없었다.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일이다.

한편 치매행은 간곡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거기에

담긴 맛깔스런 토속적인 시어들이 시의 향기를 더해

주고 있다. 이 간절한 노래들의 힘으로 병석의 아내가

어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으면 좋겠다. -임보(시인)

 

 

 시인의 말

 

매화 찾아 먼 길을 걸었으나

아직도 눈은 내리고,

바람은 잔잔하나

꽃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걸 어찌 내 뜻대로 하랴

그간 숱한 흔적과 얼룩이

고운 무늬가 되어

이쪽과 저쪽을 이어 주기를

담담히, 그저, 바랄 뿐!

 

2020년 봄날에

홍해리 적음.

 

 

 치매

    -치매행致梅行 391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지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을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치과에서

    -치매행致梅行 331

 

아내는 밥도 못 먹고

누워만 있는데

 

나만 잘 먹고 살자고

새 치아를 해 넣다니

 

뼈를 파고

쇠이빨을 박다니

 

내가 인간인가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시간은 제자리

    -치매행致梅行 332

 

누워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면

두 눈에 고요한 원망이 그렁그렁

망연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바람이 와서 운다

 

산 하나 넘고 나면

더 높은 산이 막아서고

강을 건너면

또 다른 강이 검푸르게 넘실거린다

 

어쩌자고 시간은 아득바득 흘러가는가

시간은 제자리인데

내가 무턱대고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그리운 항구도 없고

즐거운 술집도 없는

 

살아 있는 무의식이 있을 뿐

의식은 어디로 갔나

 

내 영혼의 아들마늘은 어디 있는가

 

동생이 살았으면 좋겠다가도

때론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도 든다.”*

 

---

*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길버트의 혼잣말.

 

 

 천편의 시

    -치매행致梅行 347

 

*편지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감사히 받았습니다

뜨겁게 축하합니다

기왕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했으니

천 편의 시를 쓰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신Muse詩神도 감동하리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환자의 병을 말끔히 낫게 해 줄 것입니다

축원합니다!

                            -김석규 드림.

 

*답신

그래 천 편의 시를 쓰자

아니, 천 편 아니라 만 편인들 쓰지 못하랴

병든 마누라 팔아 시를 쓴다고

누가 얄밉게 비아냥대든 말든

그게 뭐 대수겠나

그래서 아내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천 편, 만 편의 시를 쓰고 또 쓰리다!

                            -홍해리 드림.

 

 

 그대들은 안녕하신가

    -치매행致梅行 335

 

바람 불면

바람 따르고

 

물결 치면

물결 따르고

 

그냥

그렇게

밀리고 쓸리고,

 

풀꽃 만나면

풀꽃 되고

 

새를 만나면

새와 놀고

 

그냥

그렇게

피고 지고

놀고 가고.

 

 

                                * 홍해리 시집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놀북, 2020)에서

                                  * 사진 : 요즘 숲에서 왕성하게 피고 있는 등수국 꽃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https://jib17.tistory.com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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