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변잡기·洪錫珉 기자

<酒변잡기> 아들에게

洪 海 里 2006. 2. 27. 16:18

아들에게

아들아, 새해가 밝았다.
아빠의 주력(酒歷)도 이제 어언 20년이 다 돼 가는구나.
직업이 직업인지라 지난 연말에는 참으로 술자리가 많았다. 흥청망청한 분위기가 싫어 꼭 필요한 자리만 가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하루걸러 술자리였구나.
12월초에 네 할아버지께 e메일을 받았단다.
“홍 기자, 추운데 고생이 많겠구나. 끼니 제대로 챙겨 먹으면서 일하거라. 밥이 힘이다. 연말이라고 술자리 너무 자주 하지 않도록 유념해라. 애비의 걱정이다. 건강!”
나이가 어느덧 40을 향해 달려가는 아들에게 아직까지 끼니 챙겨먹으라는 걱정을 하시는구나.
아빠는 메일을 읽다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술이라면 누구보다 좋아하시는 당신이 아니시던가 말이다.
술자리에 가보면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게 된단다.
그 가운데에는 취할수록 더 꼿꼿한 기백을 자랑하는 이도 있지만, 사소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폭발시키거나 억눌렸던 자의식을 갑자기 드러내 평소 가졌던 호감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이도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아빠는 전자에 가까운 편이라고 자부한다. 이건 다 처음에 할아버지께 술을 배운 덕분이다.
술도 나이를 먹는다. 사람들은 어릴 때는 나이를 먹고 싶어 안달이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다.
술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나이에 따라 변해간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어린 술을 마시게 되지만 웬만큼 술을 마신다 싶으면 오래 묵은 술을 찾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어느 순간 다시 어린 술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중년이 청춘을 그리워하듯이. 불행하게도 인생은 다시 청춘으로 되돌릴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린 술을 마실 수 있는 자유는 남아있다.
사람도 술처럼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술이 무엇일까. 좋은 술을 계속 찾다보면 끝이 없다.
아빠는 어느 술이든 빚은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술을 빚는 장인들은 언제나 최고의 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빚어진 술의 가슴 속에는 한편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더 좋은 술도 언제나 있을 수 있다는 겸손이 담겨 있단다.
비굴하지 않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 아빠는 자부심과 겸손의 조화야말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즐거운 게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3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는 그 은밀한 동지의식이란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가졌던, 술꾼끼리 통하는 그 가슴 뿌듯한 감정을 아빠는 너와도 나누고 싶단다.
아들아, 그래서 말이다. 너도 나이가 차면 이 아빠가 직접 술을 가르칠 생각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앞에 앉히려고 한단다.
다음에 할아버지를 뵙게 되면 꼭 말씀드리려무나. 네가 술을 마실 수 있게 되는 그날까지 오래 사시라고, 그래서 언젠가 3대가 한 자리에 앉아 술을 따라드릴 기회를 주시라고 말이다. 네 부탁이면 할아버지는 꼭 들어주실 테니 말이다.
아빠는 생각만 해도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새해 아침에 아빠가 씀.

-『윈저프레스』(2006년 1, 2월호)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