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4월 19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카네기홀.
3000여 명의 청중은 한 흑인 가수의 노래를 홀린 듯 듣고 있었다. 청중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때로는 탄성을 뱉으며 가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완전히 빠져 들었다.
카네기홀이 어떤 곳인가. 차이콥스키(차이코프스키) 같은 클래식 음악의 거장들이 거쳐 갔고, 세계 모든 음악인이 평생 한 번이라도 서 봤으면 하고 꿈꾸는 무대 아닌가.
그곳에서 대중가요를 부르고 있다. 그것도 흑인 가수가.
‘칼립소의 제왕’ 해리 벨라폰테다.
1927년 3월 1일 미국 뉴욕 할렘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가장 성공한 흑인 연예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미국 음반판매 사상 처음으로 100만 장 이상이 팔린 앨범(‘칼립소’·1956년)의 주인공이었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을 수상한 첫 흑인 프로듀서였고 영화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야말로 ‘슈퍼 엔터테이너’였다.
그의 노래는 흥겹지만 한 꺼풀 밑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 있다.
‘칼립소’라는 음악 형식 자체가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의 노동요(勞動謠)에서 왔다.
그의 대표작 ‘바나나 보트 송’만 해도 자메이카 노예들이 바나나를 실을 때 부르던 노래다. 백인 농장주들은 능률을 높이기 위해 무더위가 가신 한밤중에만 일을 시켰는데 지친 노예들은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
할렘에서 태어나 자메이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벨라폰테. 차별과 억압을 지켜보며 자란 그가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는 1960년대부터 반(反)인종차별, 반전(反戰) 운동의 최전선에 선다.
지난달에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강펀치’를 날려 매스컴을 탔다. 베네수엘라의 한 방송에 출연해 “부시는 세계 최대의 테러리스트이자 전제 군주”라고 비판한 것이다.
칼립소의 제왕과 사회운동가. 팬들은 어떤 모습에 더 점수를 줄 것인가. 1959년 카네기홀 공연 실황을 들으면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감동이 밀려온다. 정치적인 발언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달리 들을 수 있지만 음악은 다르지 않을까. 세속적이라고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다. 개인적으론 음악에 한 표!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