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하구사람 5

가을 하늘

가을 하늘 洪 海 里 아득하다는 거리는 차라리 없는 것 덧없다는 말은 오히려 애틋한 것 우리의 인연은 전생서 이생까지 아득한 거리는 이승서 저승까지 아내여, 지금 가는 길이 어디리요 하늘은 맑은데 오슬오슬 춥습니다. * 감상 떠가는 구름으로 족해 가을 하늘에 걸린 시 전생에서 이생까지 날아왔으니 당신과 나의 인연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잇는 시작詩作 나는 이제 당신이 떠난 길 더듬어 저녁이 들어올 때까지 시를 들이는 것 나는 이제 어쩔 도리 없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집을 또 한 채 짓고 옆자리를 비우네 시를 사는 것이 어쩌면 알맞은 고백과 알맞은 침묵이라 한 칸 한 칸 건너는 시의 행처럼 말하고 또 한 발자국 행간의 말없는 눈짓을 바라나 원대로 되지 않아 마음은 당신의 길 자꾸 올려다보네 저렇게 맑은 하늘 ..

만첩백매萬疊白梅 - 치매행致梅行 · 403 / 금강

만첩백매萬疊白梅 - 치매행致梅行 · 403 洪 海 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만 장의 꽃 한평생 읽어도 못다 읽을 꽃 한 송이 한 장씩 열리고 한 장씩 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뭉텅! 무더기 무더기 지고 있다 매화꽃 한 장 한 장 눈물에 젖어 정처 없이 흘러가는 길 어디일까 바람에 슬리는 꽃잎, 꽃잎 매화 마을은 없다. * 감상 일생 겹쳐지는 겨울과 봄 사이 피고 지는 그 많은 꽃의 말을 다 읽을 수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없는 날이 닥치고 이제는 한 장 한 장 머금은 눈빛을 줍네. 말없이 떨어진 꽃잎에 햇살 놓이면 당신 웃음 한 번은 피어날 것 같아. 손에 쥔 꽃잎에 눈물 한 방울 내리면 들어주지 못한 소원 한마디는 건질 것 같아. 한 잎 한 잎 따서 놓네. 한 잎 또 한 잎 ..

치매 - 치매행致梅行 · 391 / 금강

치매 - 치매행致梅行 · 391 洪 海 里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지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을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 감상 날린 생각 한 줌만큼 몸은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몸이 중심을 잃고 허둥대면 누군가 달래 앉힌다. 그중에도 수많은 생각이 날아가고 그가 짓는 웃음의 기억도 희미해진다. 점점 고요 … 고요해지면 속울음도 감출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이별하는 것 … 그 생각만으로 슬퍼진..

시를 찍는 기계 - 치매행致梅行 · 346 / 금강

시를 찍는 기계 - 치매행致梅行 · 346 洪 海 里 "마누라 아픈 게 뭐 자랑이라고 벽돌 박듯 시를 찍어내냐?" 그래 이런 말 들어도 싸다 동정심이 사라진 시대 바랄 것 하나 없는 세상인데 삼백 편이 넘는 허섭스레기 시집『치매행致梅行』1, 2, 3집 아내 팔아 시 쓴다고 욕을 먹어도 싸다 싸 나는 기계다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는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무감동의 쇠붙이 싸늘한 쇳조각의 낡은 기계다 집사람 팔아 시를 찍어내는 냉혈, 아니 피가 없는 부끄러움도 창피한 것도 모르는 바보같이 시를 찍는 기계다, 나는! - 포켓프레스 2019. 12. 23. 게재. * 감상. 화사하던 시절에는 눈이 멀었지. 이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부서질 것 같아 차라리 눈을 감네. 눈을 감으면, 말 없는 말이 당신 얼굴에 피어나..

수의에는 왜 주머니가 없는가 - 치매행致梅行 · 360

수의에는 왜 주머니가 없는가 - 치매행致梅行 · 360 洪 海 里 뼈는 바위가 되어 산으로 솟고 살은 흙으로 돌아가 논밭이 되리라 피는 물이 되어서 강과 바다를 이루고 숨은 바람이 되어 푸나무들 숨통 틔우고 넋은 비잠주복의 생명이 되어 뛰어놀리라 주머니는커녕 수의인들 무슨 필요가 있으랴! * 감상 떠나는 날에는 돌아보지 않기로 내 뼈 한 조각에 내 살 한 점에 내 숨 한 모금에는 사랑한 기억만 남기노라 떠나는 날에는 붙잡지 않기로 하늘에 나는 새와 헤엄치는 물고기와 광야를 달리는 짐승과 은밀하게 기어다니는 벌레들에게 내 시를 돌려주노라 누군가 불을 켜는 저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어디선가 내 시를 읽는 이 당신이 남긴 시를 읽는 이 또 시인의 집을 짓고 살고 - 금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