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 詩選』(1983)

보리밭

洪 海 里 2006. 11. 16. 20:18
보리밭

洪 海 里 


  1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품 안
토양산성土壤酸性의 이랑마다
늦가을 햇살만 기운 채 빗기고 있었다

가랑잎을 갉아 먹으며
산자락을 휘돌아 온
앙상한 뼈바람이
풋풋한 흙 속의 한 알 보리를 흔들어
잠을 깨우고 있었다

다섯 뿌리 하얀 종자근이
발을 뻗어내리는 속도따라
햇살은 점점 기울어져
조금씩 모신母神의 품으로 내리고 있었다



  2
두견새 목청 트이는
동지 섣달
칠흑빛 어둠을 뚫고
겨울을 털어내리는
하얀 눈은 내려 쌓이고,
깃털, 꽃머리, 비늘잎도 모두
밑둥마디에 묻어두고
한 치 땅 속에서 언 발을 호호 부는 소리

아직은 잠결,
유년 시절 고호의 손가락 같은
하얀 이파리들
골로만 모여 쌓여 있는
바람의 넋을 불러내어,
들뜨는 팔다리를 눌러 앉히며
미루나무 물 오를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3
손톱 같은 달이
모과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부황이 든 얼굴
부러진 팔과 다리가 규폭마다 일어서고 있었다

짝 잃은 신발 한 짝
지난 겨울 아이들이 놓치고 간
연줄을 잡고 있었다
잠깨어 목마른 아우성에
강도 마르고
불처럼 이는 함성

새벽새의 울음소리
신선한 벌판
3월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4
어디선가
종달새 노래가 밝게 쌓이고 있었다

하늘의 시녀들이 부르는 노래 -----

몸뚱어리도 질박한 처녀처럼
뒹굴어도
껴안고 뒹굴어도
물들지 않을 바다
때깔 곱게 익고 있었다

밭 둑 미루나무
물이 올라
이파리마다 눈이 부신 정오
바람에 옆구릴 간질린
나비 한 마리
부산히 하늘을 털어내리고 있었다



5

햇볕이 
땡땡땡 울고 있었다

대창을 든 병사들처럼
갈구리까락을 받쳐 들고
아이들이
그을음없이 타는 유화油畵,
황금 벌판을 파도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미친 듯한 반 고호의 자유自由
넓은 밭마다 가득 차고
한켠으론
황토黃土ㅅ빛 고개가 보였다
반만년 오른 고개가 보였다
찌르륵 찌륵,
여치가 한낮을 걸르고 있었다.


(시집 『花史記』1975)

* 보리 : 임교선 시인의 페북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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