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
1989년 시인 기형도 영화관서 변사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은 손님. 고개는 꺾여 있었다. 영상(映像)에서 영원으로. 기형도는 스스로 노래했듯이 “가면을 벗은 삶”(시 ‘겨울 눈 나무 숲’)으로 떠났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극장. 사인은 뇌중풍(뇌졸중)이었다.
4년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무명 시인. 8일자 신문의 짤막한 기사는 그를 기자라 불렀다. 엿새 뒤가 스물아홉 번째 생일. 서른, 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나온 건 두 달 뒤였다.
“나의 영혼은/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펼쳐볼 것인가.”(‘오래된 書籍’)
절망의 고독. 펼쳐든 이들은 숨이 멎는 듯했다. 단조의 독창이 잔뜩 웅크린 채 폐부를 찔러 왔다. “절망이 빚은 환시(幻視)의 아름다움”(평론가 강계숙)이다.
1980년대는 문학계도 전쟁터였다. 암울한 현실이 생경한 줄긋기를 부추겼다. 누구는 일어섰고 누구는 등을 돌렸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너무도 분명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오후 4시의 희망’)
살벌한 경계선에서 시인은 무너짐을 노래했다.
동년배의 공감은 도화선이었다. 1990년대 세대에게 ‘기형도’는 신화로 폭발한다. 우울한 존재의 부유(浮游)에 젊음은 열광했다. 기형도는 그들에게 보들레르이자 베르테르였다.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가수는 입을 다무네’)
창공의 별이 됐지만 신화의 일상은 소탈했다. 유년의 상처에도 배려심이 깊고 치우치지 않았다. 그 흔한 주사(酒邪)도 없었으며 대화는 온화했다. 벗들과 자주 어울렸고 노래를 즐겼다. 베르테르의 극단도, 보들레르의 타락도 그의 몫은 아니었다. 다정한 친구이자 좋은 형. “죽음으로 신화가 된 게 아니라 시 자체가 신화”(김춘식 동국대 교수)다.
짧은 만남에도 이별은 있다. 떠날 사람은 떠난다. 흔적은 지워지기도, 화상이 되기도 한다. 기형도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시가 괄시받는 요즘도 한 달에 1000부 이상 팔린다.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나리 나리 개나리’)
신화가 아니라 시대를 함께 호흡한 좋은 시인이었기에 흔적은 갈수록 커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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