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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연, 인간 그리고 시 /『봄, 벼락치다』/ 신현락

洪 海 里 2007. 4. 30. 18:12

 <서평>

 

자연, 인간 그리고 시

-洪海里 시집『봄, 벼락치다

 

신 현 락(시인)


 홍해리의 시집『봄, 벼락치다』는 비교적 잘 읽힌다. 대부분 시의 길이가 짧을 뿐 아니라 리듬감 있는 작품의 특성 때문이다. 현재 많은 시들이 산문과 구별이 안 갈 정도로 길고 리듬을 무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데 비하면 홍해리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에 충실한 편이다. 특히 리듬감이 풍부한 시들은 읽는 이들에게 전체적인 의미의 통일성을 주기 때문에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홍해리 시의 친근감은 시의 주된 배경으로 등장하는 자연에서 비롯된다. 시에서 자연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시에서 자연의 문제는 참으로 오래된 주제이다. 영어사전에서 자연이란 의미는 약 70여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자연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범박하게 말해서 ‘자연이란 우주 만물이며 우주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넓게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적인 개념이면서 좁게는 문명이나 도시와 대립된 개념이다. 문학에서의 자연은 시대, 지역, 계층, 문학의 갈래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령 선시에 등장하는 자연은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향가에서 나오는 자연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담고 있는 불교적 세계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자연은 우리 시가의 전통적인 소재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이 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시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홍해리의 시집은 의미 있는 문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시집은 자연을 완상하고 자연을 통해 이상과 현실에서 갈등하고 있는 인간의 성정을 표현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시인의 세계관의 집결체이다. 근대시에서 자연을 노래한 시인은 많다. 김소월의 소외된 인간의 자연, 청록파의 자족적인 자연, 신석정의 노장적 사상을 배경으로 한 목가적 자연, 김달진의 선과 노장적 자연, 서정주의 불교적 색채가 가미된 무속적 자연은 우리 근대시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자연의 양상이다. 오늘날 문명의 발달로 인한 환경파괴를 우려하는 시인들이 생태시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는 경향이 시단을 풍미하고 있다.

홍해리 시는 자연을 관조하고 깊은 애정을 통해 자연과 현실세계와의 조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연시 혹은 생태시와 상통한다. 그러한 시들은 자연과 인간이 원래 하나라는 관점을 가진 일원론적 세계관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자연과 인간, 세계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사상은 모든 서정시의 근본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홍해리의 시는 그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의 시는 환경파괴에 대한 고발이나 현실 이전의 상자연적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태시나 자연시와 다르다. 그는 자연을 특정한 이념의 알레고리나 현실도피 장소로서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자연을 정한의 상징물로 사용하던 옛시가의 전통에 충실한 작품도 있지만, 그의 시의 자연에는 배경으로든 전경으로든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을 완상하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수천 수만 개의 꽃등을 단 매화나무가 날리는 향이 지어 놓은 그늘 아래 꽃잎 띄운 술잔에 열이레 둥근 달도 살그머니 내려와 꽃잎을 타고 앉아 술에 젖는데,


꽃을 감싸고도는 달빛의 피리 소리에 봄밤이 짧아 꽃 속의 긴 머리 닿아 내린 노랑저고리의 소녀가 꽃의 중심을 잡아,


매화를 만나 꽃잎을 안고 있는 술잔을 앞에 놓고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있는

시인들,


차마 

잔을 들지도 못한 채 눈이 감겨 몸 벗어 집어던지고.

                                                     -「옥매원의 밤」전문


매화나무와 향, 꽃잎, 달빛, 시인들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곳이 다름 아닌 ‘술잔’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술잔이란 인공적인 산물이다. 술잔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경지를 보여주는「옥매원의 밤」은 자연 속에서 풍류와 멋을 즐기는 홍해리 시인의 시정신의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위의 시에서 ‘꽃의 중심을 잡’고 있는 소녀는 주석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롭고 황홀하게 하는 존재이면서 시인과 자연의 중매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인공적인 사물인, 매화꽃잎이 떠 있는 술잔은 그 자체로 봄의 모든 신비로운 기운이 녹아 있는 자연이 된다. 그 잔을 ‘차마 들지도 못하고’ ‘몸 벗어 집어던지’는 시인들도 자연이 된다. 이처럼 자연이 배경이 될 때에는  자연을 완상하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멋과 풍류를 노래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자연과 동일성을 지향할 때에도


봄이 초록빛 길로 가고 있다

어둠 속에 잉태하고 있던 것마다

폭죽처럼 출산하고, 이제는

연둣빛 미소로 누워 있는 어머니

바람은 후박나무 잎에 잠들고

여덟 자식들은 어디 숨어 있는지

느리게 느리게 봄이 흘러간다

무심하게, 눈물처럼, 나른나른히.

      -「생각에 잠긴 봄」전문


위의 작품처럼 사물의 의인화를 통해 자연화된 인간을 노래한다. 자연화된 인간은 인간과 자연이 동일성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과 인간의 구별이 없는 동일성의 성취는 사실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봄에 피어나는 초록빛 생명처럼 어머니도 생명을 낳으시고, 봄이 가는 것처럼 어머니도 가버리시지만 화자는 그게 못내 아쉽다. 그게 자연의 섭리이지만 사람의 정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막 행에서 봄이 흘러감을 ‘무심하게’라고 표현한 것이다. 자연과의 적절한 거리를 보이는 이 마지막 행은 자연을 신비화하지 않는 홍해리 시의 특징을 담고 있다. 노자는 자연을 통나무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는데, 자연이란 원래 신비한 도를 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신비롭게 여기며 상징화할 뿐인 것이다.  

이렇듯 자연화된 인간을 노래한 작품이 이 시집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조팝나무꽃」,「참꽃여자」,「꽃 진 봄」,「달개비꽃」,「찔레꽃」,「첫사랑」,「나팔꽃」 등의 시에서와 같이 꽃을 여자로, 즉 어머니, 생과부, 미친 여자, 무명보자기를 둘러쓴 계집애, 얼굴이 둥그렇고 눈이 큰 소녀, 까막과부 등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인이 자연을 여성성으로, 만물을 낳는 출산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꽃은 가장 화려한 출산의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인의 다른 시 「영원이란 무엇인가」에서 나오는 구절처럼 꽃은 ‘현빈(玄牝)의 꽃’인 것이다. 현빈이란 바로 우주의 자궁이며 생명의 근원을 일컫는다. 그러기에 꽃을 여자로 비유하여 찬양하며, 역설적으로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리라. 다만 더 이상 생명을 출산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의 모습이 꽃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시인의 비극적인 세계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이 왜 꽃을 그러한 비극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아마 시인의 경험의 원형을 밝혀내는 심리적 접근 방법이나 전기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하리라고 본다- 홍해리 시인이 자연을 보는 관점이 자연을 단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과 만물을 포괄하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점만은 짐작할 수 있다. 굳이 노자나 헤겔의 자연철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연의 요체가 생명임을 알고 있다. 자연은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그 근원에는 생명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생명성을 잃은 자연이 자연으로서의 의미를 잃듯이 출산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여자는 죽어버린 자연처럼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그가 계절 중에서도 주로 봄을 노래하는 연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판단된다.   

그의 시집에 등장하는 계절은 대다수가 봄이며 봄을 이루는 것들과 그러한 자연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시에 계속 반복되는 봄과 봄을 이루는 것들이 그러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봄에 대한 그의 특별한 감수성과 언어적 표현력에 기인한다.


목련아파트 101동 1001호

창 밖만 바라보던 눈먼 소녀

목련꽃 하얗게 피었다

이울던 저녁

달빛을 타고 뛰어내렸습니다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을 기다리던 신부

소리 소문 없이

져 버렸습니다

    -「목련꽃, 지다」일부


지루한 겨울을 이기고 봄을 알리며 피는 봄꽃은 부활과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나 목련꽃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목련의 개화보다는 낙화 쪽에 기울어 있다. 그 시선은 죽음에 잇닿아 있다. ‘눈먼 소녀’, ‘면사포를 쓴 신부’는 목련꽃의 은유로서 비극적이며 순수한 이상의 표상이다. 그것이 하얀 목련꽃의 낙화처럼 ‘소리 소문 없이/ 져 버리’고 마는 것은 시인이 인식하는 봄이 그저 희망만 가득 찬 봄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봄이 목련꽃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생명이 피어나는 계절이긴 하지만 또한 봄은 목련꽃이 지듯 그렇게 가버리는 무상함과 연관되기도 하며 역설적으로 봄이 그러하기에 더욱 각별하게 봄을 노래할 수밖에 없음을 짐작케 한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시인의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일락말락 한 날개 같은 저 꽃들

하늘하늘 눈부신 저 허망함으로

꽃자리마다 비우고 나면

또 얼마나 아픈 상처만 남을 것이랴


그 흔적이 지워지기까지는

또 얼마나 곡두의 눈물만 흐를 것인가,

꽃들은 순수하기 위하여 옷을 벗고

영원하기 위하여 날개옷을 버리느니

           -「눈부신 슬픔」 일부


꽃의 개화는 출산과 생명을 꽃의 낙화는 죽음과 사망을 상징한다. 시인은 ‘날개 같은 꽃들’에서 ‘하늘하늘 눈부신 허망함’을 동시에 본다. ‘꽃 진 자리’에 ‘아픈 상처만’ 남을 것이지만 또한 그 자리에서 순수와 영원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개화/낙화는 생명/죽음의 대비이며 봄꽃을 통해 시인은 그 두 영역을 동시에 바라보며 두 세계 사이의 간격을 무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과나무 꽃을 보면서도 ‘가슴속//환하고//황홀한//무덤 하나’「첫사랑」를 노래하는 것이다. 시인이 계속해서 봄과 꽃을 노래하는 이유는 아마도 삶과 죽음의 두 세계를 가장 아름답게 그러나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대상이 봄과 꽃인 까닭이리라.

 시집『봄, 벼락치다』는 봄의 무상함과 봄에 피어나는 생명의 찬란함이 언어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 있다. 무엇보다 이 시집의 특징을 들라면 시인의 언어적 감수성을 빼 놓을 수 없다.


바락바락/ 발악을 하고 있는/ 저 매미(「중복」중에서)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추억, 지다」중에서)


하박하박하든 차란차란하든/ 품안에 꼬옥 안기는 한 편의 시(「그녀가 보고 싶다」중에서)


겔리 게을리 게으르게/ 느릿느릿 느리게 살고 싶어(「산적」중에서)


아뜩아뜩 단풍드네(「은유의 기쁨」중에서)


가을가을 둘이서 밤 깊는 소리(「연가」중에서)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찔레꽃」중에서)


솟쩌억 소옷쩍 서쪼옥 서쩍 섯섯쪽 울어 쌓다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겨자씨만한 그리움도 참아라! 참아라! 할 때면(「다시 보리밭 속으로」중에서)


인용한 부분 외에도 시집의 많은 곳에서 독자들은 시인의 독특한 어법을 발견할 것이다.  같은 낱말의 반복과 동음이의어의 사용 및 연상되는 언어로의 확장과 의성어의 사용은 시에 리듬을 강화시키고 내연적 의미를 확산시켜 시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잘 못 쓰면 매우 상투적이 될 이러한 수법이 홍해리 시에서는 매우 적절하게 구사되며 시를 읽는 재미를 제공해 준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같은 언어의 반복적 사용이 이처럼 많이 등장하는데도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작품은 거의 보지를 못하였다. 내가 아는 한 홍해리 시인의 언어적 감수성은 당대를 대표할 만하다고 본다. 그의 언어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그런 시」, 「색」, 「일탈」, 「매화나무 책 베고 눕다」가 주목할 만한데 선과 노장적 언어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한 언어적 인식과 감수성이 화려하게 폭발하여 시집 『봄, 벼락치다』를 물들이고 있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몸 열고 나오는 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 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봄, 벼락치다」전문


이 얼마나 화려한 언어의 향연인가. 마치 판소리처럼 절제와 풀어짐, 빠름과 느림을 조절해가며 전개해 나가는 리듬감하며, 봄 산에 꽃이 핀 모습을 ‘연분홍 파르티잔’이나 ‘나무들의 소신공양’으로 비유한 것하며, 선적인 할(喝)을 연상케 하는 끝 연의 절묘함까지……. 시인의 언어구사는 자유자재하여 막힘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시의 주제는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어서 ‘살피가 없다’라는 진부한 것이지만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시인의 갈등과 자연의 이치에 관한 ‘소소명명’한 깨달음을 활달한 언어와 봄의 이미지를 빌어 적절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연보를 보니 홍해리 시인은 시집 『투망도(投網圖)』로 1969년에 등단했으니 어언 시의 나이 40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거의 원로급이라고 할 시인의 자연에 대한 관조의 시선과 시에 대한 열정이 이 시집에 녹아 있다. 옛날 유마힐이 왕유의 그림을 보고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홍해리 시인의 시에는 자연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자연이 있다.

나는 홍해리 시인의 작품이 이 문단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그렇다고 문단 현실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언어란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물며 언어의 꽃인 시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좋은 시는, 의미 있는 시는 독자의 가슴에 살아남을 것이다. 이 시집은 자연 속에서 자유자재하며 시 쓰기를 꿈꾸는 시인의 오랜 연륜으로 빚어낸 자연과 언어에 관한 ‘진경산수’(「소금쟁이」)로서 기억될 만하다. 나는 홍해리 시인이 앞으로도 그가 쓴 것처럼 ‘듣는 이/ 보는 이 하나 없는/ 한밤에도’(「은자의 꿈」) 정정한 주목처럼 꼿꼿하게 환하게 시를 쓸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찔레꽃을 보면서도 ‘푸른 귀가 시리던’(「찔레꽃」) 선비를 상상하는 빛나는 감수성과 원숙한 시력을 지닌 시인이 보여줄 절창을 기대해 보아도 좋을 듯싶다. 홍해리 시인의 자화상 같은 다음의 시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시의 나라

우이도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과 행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홍해리는 어디 있는가」전문


                                                      - 월간『우리詩』(2007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