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내가 이곳에 오는 까닭은 / 손소운(시인)

洪 海 里 2009. 2. 13. 06:28

내가 이곳에 오는 까닭은

 

 

내가 '우리시 카페' 에 오는 까닭은 설익어 풋내나는 글을 자랑삼아 올리려는 심사에서가 아니라 '우리詩진흥회'의 시인다운 시인들이 쓰신 좋은 시를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도 푸짐하게 읽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지난해 12월 중반에 이 카페에 가입을 해 놓고도 글 하나 제대로 올리지 않았고 줄창 읽기만 했던 점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날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좋은 시 읽기에 우선하여 충실할 것 입니다.

 

이 혼탁한 시대의 갈증을 무엇으로 해갈할 것인가에 목말라 하고 있는 '우리詩' 독자 입니다.
시다운 시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오늘의 문단에서 '우리詩'를 읽음과 홍해리 시인님의 시다운 참시를 읽는 것은
나의 대단한 기쁨이며  시적 삶을 살아가는 보편적인 서정성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적인 삶과 생각을 넓혀 가는 행복한 모색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홍해리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서  '물의 뼈"에 관한 의식에도 어렴풋이 미메시스적인 시의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새벽 찬바람에 정신을 씻고 마음을 다지며 처방으로 쓰시는 '비타민詩'를 읽으며 이 사람의 황폐하던 마음과 정신에 많은 약효를 보고 있답니다.                
대단히 고마운 일 입니다.

 
홍 시인님의 시 뿐만 아니라,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모두 버리러 왔다/ 몇 점의 가구와/ 한 쪽으로 기우러진 인장과/ 내 나이와 이름을 버리고/ 나도 물처럼 떠 있고 싶어서 왔다'. 이생진 시인님의 「바다에 오는 이유」를 읽으면서 고립의 극한이 만들어 내는 존재론적 미메시스의 환원에 이르는 의식의 관류와 삶의 진솔한 통찰을 사유하게 되었으며, 2009년 2월호 권두시론 '신춘문예 유감'이라는 임보 시인님의 옥고를 읽으며 마지막으로 시가 일용할 양식이 되기를 기원했던 신춘문예의 심사과정에서 몇 사람의 취향에 의해서 한국문단이 흔들리고 있다는 비정한 문단의 이질적인 현상에 통증을 느껴 보았습니다.

물론 임보 시인님의 채근담의 깊이 있는 진실과 사고를 우리시에 접목하면서 쓰신 주옥 같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삶의 圖根點이 되는 소중하고 다양한 위안과 구원을 통하여 시가 세상에 기여하는 도저한 무게를 알게 되었습니다 .

또한 최근에 출간하신 시집『가시연꽃』을 읽으면서 고아로운 선비의 사물에 대한 통찰과 응축되는 상상력의 시말 전개가 읽는 재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말은 세계와의 상면 속에서 읽혀지고 독자의 의식에 작용되는 존재론적 문명에 이르는 주체적인 감성과 지성과 교양과 정서라는 사실을  그리고 진정한 시말은 상처난 환부에 기술되는 창조적인 시인의 의식이라는 사실도 더불어 알게 됩니다.

 

1932 정원사 헤세/ 박희진 시인의 시, 겨울이 온다/ 김석규 시인의 시, 중세의 편지/ 신현락 시인, 햇살의 길/염창권 시인, 어려움/ 고성만 시인, 어린왕자의 기억들/ 나병춘 시인, 시인의 편지/ 나태주 시인, 감정 미술관/ 황도제 시인, 물치항에서/ 목필균 시인, 달랑달랑/ 윤준경 시인, 그 밖에도 고창수 시인님을 비롯하여 시인다운 시인들의 좋은 시를 여기서 줄창 읽을 수 있음은 '우리詩' 독자인 나에게 있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내가 '우리시' 시인들의 시를 짚어 유독 찬미하는 까닭에 대하여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詩' 시인들의 시는 시를 읽는 독자를 난해시로 고민시키고 괴롭히지 않는 읽는 편안함을 기여하고 있다는 이유일 것이고 무슨 교훈적인 하찮은 메시지를 열거하면서 읽어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짖과 위선이 들여다 보이는 시가 아닌 읽는 재미, 읽는 기쁨, 읽는 공감 , 읽는 위안, 읽는 정서와 사유,읽는 아름다움 같은 약발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 진솔하고도 솔직하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처방이 좋은 시들로 뭉쳐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기능은 독자를 우선 편안하게 하여 읽는 기쁨과 재미와 흥미를  충분히 고려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 우후죽순격으로 함부로 정제되지 아니한 시를 남발하는 이 어지러운 문학 풍토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 자기최면에 걸려 독자를 전연 무시하며 쓴 시가 넘쳐 나는 사례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국 독자의 정서와 요구에 부응하지 못 하는 시는 자연히 소멸을 거듭하게 될 것 입니다.

독자가 읽지 아니하는 시를 수천, 만 편 써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시인은 늘 겸손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때로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독자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시가 일용할 양식이 되는 아름다운 세상은 우리 모두가 꿈꾸고 모색하고 있는 시의 천국, 그 아름다운 표상이 될 것 입니다.

우리시회 시인들은 공정하게 검증된 시인들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건강한 시인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월간 '우리詩'를 탐독하면서 아직 독자의 입장에서  단 한 번의 불만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홍해리 시인의 시를 일는 기쁨에 푹 빠지다가 독자로서의 읽음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본 카페에 가입하여 자유스런 출입도 하면서 마음 편히 많은 시인들의 신작시를 읽고 있습니다.  

내가 만만치 않은 나이에 본 카페의 회원으로 가입하고 후원회원으로도 가입하며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을 맛 보는 데에도 준비해야 할 독자로서의 갖추어야 할 예의와 읽는 사람으로서의  질서와 규칙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처음부터 홍해리 시인의 시를 읽는 재미와 흥미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독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서 시를 읽은 한 독자의 흥미와 재미를 추적하기 위하여 어느 날, 홍해리 시인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메시지에 관련된  시를  읽고 도대체 홍해리 시인이 사랑하는 여자의 실체는 어떤 모양일까? 하는 미스테리적인 흥미와 추적의 재미를 찾아내기 위하여 이 분이 쓰신 시집을 되도록 많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인과 그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는 이런 진솔한 교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실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하여 정리한 독후감 하나를 여기서 소개해 봅니다.

이 또한 내가 시다운 시를 만드는 『우리詩』를 찬미하는 독자임을 증명하는  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다음은 홍해리 시인의 시 「그녀가 보고 싶다」라는 시에 대한 독후감입니다.

 

우이동 골짜기 洗蘭軒에서 난초 이파리를 씻으며 시를 쓰는 무소유의 소유를 업으로 진경산수 한 폭,

적멸의 여백 속에 독야청청 詩맛 오감에 도통한 洪海里 시인께서 필삭筆削을 등지고 이 아련한 봄날

[그녀가 보고 싶다] 고백하시니 나는 갑자기 커지는 동공 속으로 이러한 시말을 추적해 봅니다.

그렇다면 홍해리 시인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는 그녀는 누구일까?

「참꽃여자 15」에서의 (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가운데 18쪽) '산문山門에 낯 붉히고 서 있는 사미니'도 아닐 것이고,

'목련 아파트 101동 1001호에서 창 밖만 바라보던 눈먼 소녀'는 더더욱 아닐 테고(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 가운데 16쪽),

'화포花砲 터지는 날 무화과無花果 한 알 달고 있는 생과부 같은 저 여자'도 아닐테지요(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 가운데 39쪽 "꽃진봄" ). 그렇다면 '초록치마 빨강저고리 차림으로 가쁜 대낮의 저 여자'란 말인가?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진 장미꽃 같은 저 여자'는 분명히 아닐 것 입니다. ( 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 가운데 71쪽 "6월")

'나이 들어도 늙을 줄 모르고 달래야! 한마디에 속치마 버선발로 달려 나오는그 여자'? (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 가운데95쪽 "참꽃 여자 8") 그 여자도 아닐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아, 생각이 납니다 ('우리詩' 2007년 12월호 12쪽 "석류"에 나오는  '입술 뾰족 내밀고 있는 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 그 여자도 아니라면 ('우리詩' 2008년 3월호 62쪽, "참꽃여자.6")에서의 '불같은 사랑 물 같은 사람 그리움은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이랴 수즙고 수즙어라, 그 여자'. 이 여자입니까 ? 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 가운데 88쪽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라는 시.

'눈멀면 꽃 지고 상처도 사라지는가// 욕하지 마라 산 것들 물오른다고/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허기진 가난이라면 또 어떻겠느냐/ 윤이월 달 아래 벙그는 저 빈 자궁들/ 제발 죄 받을 일이라도 있어야겠다/~~~/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홍해리 시인이 이렇듯 절절하게스리 풀어 놓는 평생 가슴에 담아놓은 그녀는 누구일까?

선명한 주홍색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참꽃 같은 잊혀진 여인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자 이제 그녀의 실체를 벗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녀가 보고 싶다 / 洪海里

 

크고 동그란 쌍거풀의 눈

살짝 가선이 지는 눈가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빛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도톰하니 붉은 입술과 잘 익은 볼

단단하고 새하얀 치아

칠흑의 긴 머릿결과 두 귀

작은 턱과 가는 허리

탄력 있는 원추형 유방

연한 적색의 유두

긴 목선과 날씬한 다리

언뜻 드러나는 이쁜 배꼽

밝은 빛 감도는 튼실한 엉덩이

주렁주렁 보석 장신구 없으면 어때,

홍분 백분 바르지 않은 민낯으로

나풀나풀 가벼운 걸음거리

깊은 속내 보이지 않는

또깡또깡 단단한 뼈대

건강한 오장육부와 맑은 피부

한번 보면 또 한 번 보고 싶은

하박하박하든 차란차란하든

 품안에 포옥 안기는 한 편의 시 詩.

(홍해리 시집『봄, 벼락치다』의  42쪽 )

 

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홍해리 시인이 그처럼 미치도록 사랑한 그녀는 바로 시詩란 것을 왜 몰랐던고.

홍해리 시인이 바람의 말, 비의 말, 빛의 말들 후리며 자연과 더불은 세계와의 상면 속에서 읽혀지는 시말,

그녀라는 주체적인 감각은 유희가 아닌 존재론적인  문명에 이르는 창조적인 시 의식이 아니겠는지요.

 

홍해리 시인은 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 가운데 20쪽  

 

거문고가 쉴 때는

줄을 풀어

절간 같지만

노래할 때는 팽팽하듯이

 

그런 시詩!

 

말의 살진 엉덩이에

'묵언默言'의 화인火印을 찍는다

언어言語

도단道斷이다.

- "그런 시詩" 에서

 

 

그는

言 寺의 住持

 

말을 빚는

比丘다   

- 홍해리 시집 1969년 『投網圖 중에서 '詩人'

 

 

낫 갈아 허리차고

바람따라 길을 가다

 

시흥이 도도하면

나무 깎아 한 수 적고

 

한잔 술 거나해서

노을 베고 자리하면

 

저 하늘 깊은 골에

떠 오르는 그믐달  

- 홍해리 시집 1996년 "투명한 슬픔" 중에서 '詩刀'

 

 

수천 길

암흑의 갱 속

반짝이는 언어의 사금

불도 없이 캐고 있는

이,

 

가슴엔

아지랭이

 

하늘엔

노고지리    

- 홍해리 시집 1998년 『愛蘭』중에서 "詩人'

 

 

난 속에

암자

 

암자 속에

비구니

 

비구니의

독경

 

독경의

푸른

빛   

- 홍해리 시집 1992년,『隱者의 북』중에서 "詩 한 편'

 

은밀한 자궁 속에서, 깊이를 잴 수 없는  암흑의 갱 속에서 반짝이는 언어의 사금을 홍해리 시인은 조심스럽게 캐고 있습니다.

이러한 홍해리 시인의 詩 빚기는 푸른 빛 독경이랄 수 있는 종교적인 의미까지를 내포하고 있는 도도한 작업입니다.

 

또,  홍해리 시집『봄, 벼락치다』가운데 135쪽

 

철새는 천리 먼 길 멀다 않고 날아간다

길 없는 길이 길이라 믿고

 

팔사적必死的이다.

 

더 쓸 것 쓰고 지울 것 지우며

막무가내 날아가는 시인詩人의 길, 멀다!.

- "필삭筆削" 에서

 

말 없이 살라는데 시는 써 무엇 하리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라다볼 일

산속에 숨어 사는 곧은 선비야

때 되면 산천초목 시를 토하듯

금결 같은 은결 같은 옥 같은 시를

붓 꺾어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 홍해리 시집 1994년,『난초밭 일궈 놓고』중에서 '詩丸'

 

우이동 골짜기 洪海里 암자 같은 洗蘭軒에 蘭丁 홍해리 시인은 난초밭 일궈 놓고 금결, 은결, 옥 같은 시를 詩丸으로 빚어 왔는데 이러한 시의  환약은 속진에 찌든 사람들 머리와 마음을 깨끗이 낫게 해 주는 신묘한 비방인 것입니다.

이제 2008년도 가을 쯤에 세계의 시단에서 유사 이래로 최초의 <비타민 시집>을 만들어 현대인들의 육신과 정신건강을 치유하며 오염된 정서를 말끔히 다스린다고 하시니  이 또한 새로운 시의 모색이 아니겠는지요.

 

내가 존경하는 홍해리 시인은,

'수천 수만개의 꽃등을 단 옥매원玉梅園의 밤  매화나무 향이 날리는 꽃 그늘 아래 꽃잎 띄운 술잔을 기우리며 꽃 속에 긴 머리 땋아 내린 노랑저고리의 소녀가 꽃의 중심中心을 잡는 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별로 돈이 될 것도 없는 시를 무엇 때문에 그리 고생하면서 쓰고 있는 것일까?

무소유의 소유를 업으로 하기에 눈 내리는 바람 찬 겨울 밤에도 창 밖으로 흐르는 세월을 내다보며 깊은 시상詩想에 잠기는 것일까.

도저한 무게로 또 건너야 할 강을 얼마나 건너야 하는 것일까.

지금, 칠흑의 도끼로 내리찍는 밤의 비명은 분명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고고한 탄성이려니.

아, 시인다운  시인이시여.

洪海里 시인이시여.

읽는 재미와 기쁨에 푹 빠질 수 있는 진솔하고 눈부신 시를 많이 써 주세요. 시위를 당기는 힘으로 힘으로.

고맙습니다.

 

 

 

 홍해리 洪海里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로 등단

  시집 "화사기花史記"/ "애란愛蘭"/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 "/ "우리들의 말"/ "대추꽃 초록빛"

 "투명한 슬픔"/"청별淸別"/ "은자隱者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외 다수.

 

         * 블로그.

       http://blog.daum.net./hong1852

       http://blog.naver.com/poet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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