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스크랩] 난전시회와 홍해리 선생의 애란시

洪 海 里 2009. 3. 15. 06:56

 

오름에 다녀오는 길에 제주학생문화원 전시실에서 3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열리는

제주동양란회 제19회 난전시회를 관람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산길 오름 모퉁이에서

이 부근에 지금쯤 보춘화가 벙글고 있을 것이나 눈이 쌓여 아쉽다는 말을 했었는데,

평소에 한 송이도 대하기 어려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명품들이 방안에 가득했다.


우리가 처음 오름에 다닐 때만 해도 어떤 곳에 가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보춘화가

가득했었는데, 오일장마다 캐다 파는 지각없는 할머니들이나 일부 악덕 조경업자의

사주를 받은 도채꾼들에 의해 날로 황폐해지더니, 지금은 산에 용케 살아남은 난 두어

촉만 보아도 반가운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시골 어떤 집에 가보면 그냥 몇 포기 캐다

화단에 심은 것이 가득히 번져 있는 것도 종종 보였는데, 그것마저 보기 힘들다.


홍해리(洪海里) 선생님은 현재 월간 ‘우리詩’를 발행하고 있는 원로시인으로 한 때

난에 심취해 방방곡곡 아니 돌아다닌 곳이 없을 정도로 애호가였다고 전해 들었다.

그 결과 주옥같은 애란시(愛蘭詩) 십수 편을 남겨 놓았는데, 모두가 난처럼 기품 있는

작품들이다. 평소에 즐겨 읽는 시와 찍어 온 사진 11장을 골라 함께 싣는다.   

 


♧ 난蘭에게 - 홍해리(洪海里)

    

난은 울지 않는다

그립고 그리우면

눈물 같은 꽃을 올린다

말없는 향이 천리를 밝힐 때

천지 가득 흐르는 피리 소리여

그대 가슴 속 깊은 우물에 비치는

세상은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가

내일은 대낮에도 별이 뜬다


 

♧ 보춘화報春花 - 홍해리(洪海里)

 

2월이 오면

너에게서 말씀 하나가 서네


불안한, 불가해한, 불가사의한, 세상

네 속으로 들어가

머물 별 하나 찾아보네


참, 오래 기다렸다

지난해 무덥던 삼복중에 너를 만나

멀리도 왔구나, 난아

 


모랫바람길 가는 낙타처럼

면벽하고 있는 수도승처럼

더 비울 것 없어 홀가분한 선비처럼


생각과 생각 사이를 뛰어넘어

말과 말 사이에 와 있다

이제 그것도 필요 없는 시간


귀 맑게 트이고

눈도 그렇게 트이도록

네 앞에 조용히 앉았느니


서두르지 말자, 이제

촛불을 꺼야 하리.

 


♧ 적아소심赤芽素心 - 홍해리(洪海里)


세상 오다 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비는 우주공간을 떠돌다 떠돌다

몸 바꾸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걸어오다 뛰어오다 도망치다

다시 달라붙기도 하네

번개도 치지 않고 천둥도 울지 않고

사냥개처럼 하늘이 젖어도

그대의 행성에는 달맞이꽃이 피고

우기의 구름 사이, 문득

적아소심이 푸른 하늘처럼 잠을 깼다는

삽상한 소식이 귓속에 찬란히 피네

 

 

그리운 심정으로 꽃대를 올려

슬픔 같은 꽃잎으로 가을날을 밝히니

눈 마주치기도 두려우리, 그대여

부드러운 물칼 같은 혓바닥으로

우주의 초연한 질서를 노래하는

꽃 속으로 천리를 가면

적멸보궁 지붕 끝이 보이리.

 

 

♧ 채란행採蘭行 - 홍해리(洪海里)


눈물은 순수의 보석

눈물 속으로, 보석 속으로 달려가는

추억은 마음의 고향


항구와 역이 그리워하는

추억으로 후진하는

배와 열차는 아름다운가


주말마다

호남선 야간열차를 탔지

정읍으로 장성으로 고창 담양 화순으로 ㅡ


 

돌아오는 화물열차는 늘 비어 있었지만

다음 주말까지는

꿈으로 그리는 난밭이 있었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

난이, 난초꽃이

꿈 속마다 지천으로 피어 있었지


추억은 그리운 고향

잊혀지기 위한

그리운 고향.


 

♧ 난초꽃 한 송이 벌다 - 홍해리(洪海里)

 

처서가 찾아왔습니다 그대가 반생을 비운 자리에 난초

꽃 한 송이 소리없이 날아와 가득히 피어납니다 많은

세월을 버리고 버린 물소리 고요 속에 소심素心 한 송

이 속살빛으로 속살대며 피어납니다 청산가리 한 덩이

가슴에 품고 밤새도록 달려간다 한들 우리가 꽃나라에

정말 닿을 수 있겠으랴만,


피어나는 꽃을 보고

그대는 꽃이 진다 하고

나는 꽃이 핀다 하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목숨은 피어나는데 ……,

 


참 깊은 그대의 수심水深

하늘못이네.


우리가 본시부터

물이고 흙이고 바림이 아니었던가

또는 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물빛과 하늘빛 속에는 불빛도 피어나 황토빛

내음까지 실렸습니다 올해에도 여지없이 처서가 돌아

와 산천초목들이 숨소리를 거르는데 늦꽃 소심 한 송

이 피어 깊이깊이 가슴에 들어와 안깁니다.


푸르르르르 백옥 같은 몸을 떨며 부비며 난초꽃 한 송

이 아프게 피었습니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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