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葉書
-홍 해리 선생님의 ‘엽서’를 읽고-
김 세형
님이 제게 보내주신
난향蘭香 엽서,
천리를 달려와 이제 마악
내 창문에 닿았습니다
숨 가쁜 마른 낙엽 하나
창문 밖, 텅 빈 가을 뜨락에
툭, 하고 떨어집니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방안에 난향이 서늘합니다
님은
묵언정진 중인 저를 염려해
‘답신을 사절하라’* 하시지만
'님의 엽서 잘 받았습니다'
답신은 아닙니다.
제 혼잣말입니다
묵언정진 중에 한 실언이었습니다
그 실언의 구업으로
앞으로 천년을 입을 닦겠습니다
지금은 새벽 세시,
텅 빈 우주 한마당에
떨어진 한 장의 마른 육신
덩그마니 홀로 앉아
말 없는 말, 제 묵언 육필을
님이 제게 보내주신
읽지 않은 난향 엽서에 실어
천릿길,
님을 향해 돌려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닿으려면 족히 천년은 걸릴 겁니다’*
*홍해리 시인님의 ‘엽서’ 중에서
창작 후기-
제 육필이 님의 창문에 닿으려면 천년이 걸릴 겁니다
묵언정진 중에 한 실언으로
제 입을 닦는데 천년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월 내내 피어오르는
난향蘭香이 천리를 달려와
나의 창문을 두드립니다
천수관음처럼 서서
천의 손으로
향그런 말씀을 피우고 있는
새벽 세시
지구는 고요한 한 덩이 과일
우주에 동그마니 떠 있는데
천의 눈으로 펼치는
묵언 정진이나
장바닥에서 골라! 골라!를 외치는 것이
뭐 다르리오 마는
삐약삐약! 소리를 내며
눈을 살며시 뜨고
말문 트는 것을 보면
멀고 먼 길
홀로 가는 난향의 발길이
서늘하리니,
천리를 달려가 그대 창문에 닿으면
'여전히
묵언 정진 중이오니
답신은 사절합니다'
그렇게 받아 주십시오
그러나
아직 닿으려면 천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홍 해리 시인의 ‘엽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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