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시> 봄, 벼락치다

洪 海 里 2011. 4. 21. 05:36

 

봄, 벼락치다 / 洪 海 里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
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蘭丁의 시집『봄, 벼락치다』(2006)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봄의 경이를 낭떠러지와 벼락이라는 역설적인 두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적인 급격한 변이를 ‘천길 낭떠러지’로, 봄이 화자의 심리에 던지는 충격을 ‘벼락’으로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벼락은 화자를 혼절케 하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광명[昭昭明明]이다. 두 이미지를 작품의 전후에 배치하여 사진의 액자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도 흥미롭다.

  속도감 있게 번지고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달래꽃들을 타오르는 불, 유격대(파르티잔)의 격전, 창궐하는 역병 등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싱그럽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푸른 불꽃으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인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향불 같다. 한겨울 감추었던 종아리 드러내고 거리로 나온 여성들 다 춘향이처럼 곱다. 벌이며 나비 같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몸치장하고 짝을 찾는구나. 이 밝은 봄날 그냥 보내지 말라고, 내 속에서도 나를 일깨우는 소리 은은하다.

  제4연은 좀 난해한 면이 없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더듬어 읽어 보면 이런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일체가 한 집안 식구와 같다. 그러므로 서로 분별할 일이 아닌데 새의 날개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난다. 속된 욕망을 잘라내고자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이 고뇌, 이 봄에도 북한산의 봄과 더불어 내가 앓는다. ‘화병’의 ‘화’는 火와 花의 중의重義를 지닌 시어로 보아 무방하리라.

이처럼 난정의 시는 활력이 넘쳐난다.

                                                                                                   - 임보 (시인)

 

  이 작품은 우선, '봄'을 '천길 낭떠러지'로 비유하고 있다. 약간 의외의 결합이다.

연을 달리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었기에 독자들이 일단 이를 수용하고 상상력을 전개시켜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거침이 없다.

즉, '낭떠러지'라는 보조관념을 투영해 보면 산자락마다 피어난 연분홍 꽃들은 '파르티잔'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산을 타고 오르는 '불'이기도 하다.

'역병이 창궐하듯 / 여북했으면 저리들'이겠는가.

그 봄이 밀어올린 극점에 '천길 낭떠러지'가 있었던 것이고, 거기에서 '벼락'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것은 꽃들이 피어나는 소리의 합창이겠지만, 그에 감응하여 일어난 "내가 날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그 봄 풍경 앞에서 또한 자기 자신과 맞딱뜨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임수만(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조응은 대자다. 조응은 즉자적 자연-기호의 의식적 읽기이다. 허나 조응은 대자화된 의식을 변증법적 합일을 통해서 모든 의식적 사태를 다시 말-자연으로 회귀시킨다. 이를테면 홍해리의 시들은 그 자체로 자연화를 지향하고 있다. 자연의 시말화를 통한 말-자연의 실현. 이것이 바로 홍해리의 시말 내에 육화된 시적 사태인데, 그것은 이중화된 의식작용이 빚어낸 결과이다. 비록 시가 귀의하는 공간은 이미 이 세계가 정의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자연의 구조화된 원리이기는 하지만, 홍해리의 시말들은 자연의 의식적 전유이다. 특히 시 「봄, 벼락치다」에 형상화되어 있는 것처럼 “연분홍 파르티잔들”이 펼쳐내는 봄꽃들의 향연을 “불”과 “역병”으로 비유하면서 비의적 섭리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날벼락치는 봄. 봄의 자의식적 읽기. 조응을 통한 봄의 의식적 전유. 홍해리의 시말들은 조응을 통한 경계 짓기와 그 경계의 소멸로 짜여져 있다. 봄을 “천길 낭떠러지”로 인식하다가 그 봄의 경계적 분할을 지워버리는 시인. 시인은 이중화된 의식의 지점을 경유하다가 왜“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라고 인식하는가. 더구나 그것도 수많은 살피(경계)로 짜여진 이 세계를 광대한 우주적 질서로 무화시키는가. 시 쓰기란 그 자체로 분절화 된 의식의 편린들을 시말로 치환시키는 형상화 작용이 아닌가. 그런데 홍해리의 「봄, 벼락치다」는 벼락 치는 봄꽃에 매달린 “마음의 삭도”를 따라가다가 땅과 땅의 경계, 계절과 계절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린다. 다시 말해서 홍해리의 시말 속에 육화된 자연과의 조응은 모든 사태를 자연의 이법 속으로 수렴시켜가고 있다.

                                                                                                            - 김석준(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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