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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곳

洪 海 里 2012. 2. 20. 14:17

600년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곳

-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ㆍ탐매 풍류 봄나들이

우수 지나 경칩이 가까우니, 이미 봄은 온 것이다. 매화는 겨울 눈 속에서 가장 빨리 봄을 알아차리는 꽃. 제주도에서는 이미 매화 소식이 건너왔다. 남해안 섬지방과 남도 양지녘에 당도한 봄은 매화 꽃봉오리를 어르며 산하대지의 한기(寒氣)를 빼내고 있는 중이다.

예로부터 잔설을 이고 피어나는 ‘설중매(雪中梅)’의 아름다운 모습과 청아한 향기를 담아낸 시·서·화는 셀 수 없이 많다. 맑고 은은하게 번지는 매향(梅香)은 따로 암향(暗香)이라고 불렀다. 선비들은 ‘매화는 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며 고결한 정신을 가다듬었고, 스님들은 ‘추위가 한바탕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꽃 향기를 맡을 수 있겠느냐(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며 용맹정진의 결기를 다잡았다.

옛 선비 사회에는 탐매(探梅)라는 풍류가 있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매향을 좇아, 춘설(春雪) 속에 피어난 매화를 찾아다니는 여행이다. 요즘 고매(古梅)를 찾아가는 탐매 마니아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넓은 들판을 꽃으로 가득 채우는 매실농원의 매화가 장관이긴 해도, 인파로 뒤덮인 그곳에서 매화의 참모습을 만나기는 어렵다. 어느 유서 깊은 선비집 담장이나 고찰의 뜨락을 몇 백년씩 지켜온 매화나무와는 격조가 다르다.

뒤틀린 고목 등걸에 보석처럼 매달린 매화를 보고, 그 향기를 음미하는 여행. 올해는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곳’으로 탐매의 봄나들이를 떠나보자.

■ 호남 명찰 매화루트

선암사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피어난 ‘선암매’. 선암사에는 사찰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령이 오래된 매화가 많다. 620년 묵은 선암 백매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눌와 제공


매서운 바람 속에 꽃봉오리를 내놓는 절간의 매화는 스님들의 혹독한 수행을 닮았다. 순천 선암사와 금둔사, 그리고 섬진강 건너 지리산 자락의 구례 화엄사는 늙은 매화나무가 흔연히 피워내는 매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낙안읍성에서 가까운 금둔사는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매화가 피는 곳으로 알려졌다. 납월(臘月·음력 12월)의 모진 추위에 꽃망울을 터뜨린다고 해서 ‘납매’라고 불린다.

붉은색으로 피는 금둔사 납매의 첫 꽃은 이미 1월 초 ‘설중매’로 피었다가 일단 졌다. 30여년 전 낙안읍성의 고가에서 자라는 600년 수령 홍매의 씨를 얻어다 심었다는 금둔사 주지 지허 스님은 “다음주면 홍매가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할 것”이라고 소식을 전해준다. 낙안읍성 납매는 이미 고사했고, 금둔사 홍매가 국내 유일의 납매라고 한다. 금둔사에는 이 밖에도 100여그루의 토종 매화가 어우러져 피어난다.

금둔사 납매가 지고나면 조계산 앞뒤로 자리한 송광사와 선암사의 고매들이 꽃을 피운다. 선암사에는 사찰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령이 오래된 매화가 많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무우전 앞의 620년생 백매와 550년생 홍매를 비롯해 100~300년생 매화 30여그루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고매가 있다. 3월이면 동시에 꽃을 피워 토종 고매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선암매’로 불리는 고매는 선암사 경내를 매향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향기가 강하다. 선암매 고목 등걸을 배경으로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영화 <취화선>을 찍었다. ‘송광매’로 불리는 송광사 백매화는 수령이 200년이다.

지리산 자락 구례 화엄사에는 우리나라 고매 중 가장 색이 붉어 ‘흑매화’라고도 부르는 ‘화엄매’가 자란다. 수령은 300~400년. 매화와 어우러진 고졸한 산사의 풍경을 선사한다. ‘고불총림’이라 불리는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는 36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매화나무다. 우화루 기와지붕 위로 가지를 걸치고 피어나는 홍매화가 고혹적이다.

■ ‘정자골’ 담양, 매정(梅庭·정원의 매화)의 진수

담양을 지나는 887번 국도변에는 수많은 정자와 원림이 있다. 소쇄원, 명옥헌, 식영정, 면앙정, 환벽당, 송강정…. 선비들의 정자에 품격 높은 매화가 없을 리 없다. 죽림 조수문의 서원인 죽림재에 있는 110년 수령의 홍매는 ‘죽림매’, 조선 중기 명신 명곡 오희도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명옥헌 원림에 있는 100년 된 홍매는 ‘명옥헌매’로 불린다.

고려말 무신 전신민이 은거했던 독수정 주변에는 150년 수령의 ‘독수매’와 300년 된 ‘서은매’ ‘전씨매’가 있다. 이 밖에 남면 지곡리 지실마을의 ‘계당매’, 대덕면 장산리 미암종가 마당의 ‘미암매’, 창평면 해곡리 유종헌 가옥의 ‘유종헌가매’, 장화리 화양마을 홍주송씨 종택(宗宅)인 하심당(下心堂)의 ‘하심매’ 등 정자·고택과 어우러진 고매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광주 전남대학교에 옮겨진 ‘대명매’도 담양이 고향이다.

■ 선비의 고장 산청, 기품 있는 산청3매

지리산 들머리 산청은 유명한 매화고을이다. 단속사 절터의 ‘정당매’, 남사마을의 ‘분양매’, 산천재의 ‘남명매’는 유서 깊은 명매(名梅)로 산청3매(山淸三梅)로 불린다. 단성면 남사리 예담촌은 500여년 역사를 지닌 양반마을이다. 전통한옥과 토담, 돌담이 어우러져 정감 있고 고풍스러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양반가가 많은 마을인 만큼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품격 있는 매화가 많다. 그중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가 고려말의 문신인 원정공 하즙이 살았던 분양고가의 분양매(원정매라고도 한다)다. 수령 610년의 고매이지만 원래의 고목은 수명을 다해 2006년 고사했다. 현재는 밑동에서 새 가지가 자라고 있다. 이 마을에는 박씨고가 마당의 ‘남사매’, 최씨고가의 ‘최씨매’ 등 오래된 매화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정당매는 속세를 끊어낸다는 뜻의 단속사 옛 절터에 있다.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을 살았던 강회백(1357~1402)이 어린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었다고 한다. 수령 630여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라고 한다. 경상남도 보호수로 지정됐다. 본래 줄기가 세 개였던 원줄기 중에서 두 줄기는 고사하여 윗부분을 잘라냈다. 나무 주변에 철제 보호책을 설치했을 정도로 수세가 약해진 늙은 나무지만 해마다 3월 초 어김없이 꽃을 피워 기품을 드러낸다.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도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의 재실이다. 남명이 직접 심었다는 매화로 수령이 400여년인 남명매는 산천재 정원에 있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죽었고, 또 다른 가지 하나는 시멘트로 보완해 고매가 겪은 긴 세월을 몸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3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가볼 만한 전국의 매화축제>

■ 제주 휴애리자연생활공원 매화축제

제주 서귀포시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에는 6만여평 부지에 7000여그루의 매화나무가 자란다. 지금 눈 덮인 한라산을 배경으로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 독특한 봄 풍경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17일부터 다음달 4일까지 매화축제 열린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봄꽃 축제다. 축제기간 동안 매화를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을 공모하는 매화 사진 콘테스트도 한다. (064)732-2114

■ 광양국제매화문화축제

섬진강변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은 가장 유명한 매화마을이다. 백운산 자락의 매화꽃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 풍경은 꽃과 산과 강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다. 청매실농원전통옹기도 매화 풍경의 멋진 배경이 된다. 올해는 3월17일부터 25일까지 9일간 축제가 펼쳐진다. 주제는 ‘봄날의 설레임, 매화꽃 어울림’. 매화꽃길 음악회, 전국사진촬영대회, 매화사생대회,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등이 마련된다. (061)797-3714

■ 김해건설공고 매화축제

경남 김해시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는 1927년 개교 당시 한 일본인 교사가 의욕적으로 매화를 심었다고 한다. 교문을 들어서면 200m에 이르는 진입로 양쪽에 수령 100년의 고매들이 줄지어 서 있다. 줄기가 땅으로 휘고 구불어진 와룡홍매와 와룡백매가 유명하다. 매화가 피기 시작하면 학교를 개방한다. 3월 중순에는 학교와 학생들이 축제를 연다. (055)336-4081

■ 보해매화농원 사진촬영대회

보해양조에서 1979년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 국내 최대 규모인 약 14만평의 매실농원을 조성하고 매화나무 1만5000그루를 심었다. 3월 말에는 농원 전체가 하얀 눈밭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화꽃이 만발한다. 해마다 매화꽃 만개 시기에 맞춰 농원을 일반에 개방하고 사진촬영대회 등을 연다. (061)532-4959


<이 책 들고 떠나요>

<우리 매화의 모든 것>(안완식·눌와)은 매화의 아름다움, 역사, 생태, 용도, 향기까지 담아낸 책이다. 토종연구가인 저자가 30여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뛰어 100년 이상 된 고매와 명매 250여점을 1300여컷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고매는 그 역사와 장소에 따라 이름이 붙어있다.

저자는 각 매화나무의 역사, 특징적인 모습을 글과 사진에 꼼꼼히 담아냈다. 특히 나무의 수형, 꽃, 꽃봉오리, 어린 잎, 묵은 잎, 매실, 핵, 어린 가지, 밑동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군자를 상징하는 기품 있는 꽃 매화에 담긴 옛 선조들의 인문정신, 매화의 지리적 분포, 매실의 성분과 이용 방법 등도 상세하게 소개한다.

매화 향기 속에 녹아 흐르는 선비들의 격조 높은 정신세계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섯 그루의 매화 이야기, 꽃이 가장 먼저 피는 제주의 매화, 4월 상순에야 꽃망울을 터트리는 서울의 매화 등 한국 고매화가 총망라되어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아끼며 직접 가꾸었다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퇴계 이황과 두향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는 안동 도산서원의 ‘도산매’, 허련이 심었던 일지매의 후대목이 자라는 진도 운림산방의 ‘운림매’ 등 매화와 인물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매화는 2월 중순 시작돼 3월 중순까지 핀다.

부록의 매화목록을 통해 모든 고매의 소재지와 개화시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봄 탐매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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