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錫珉 기자 칼럼

<책갈피> 0,007초를 단축하라!

洪 海 里 2012. 8. 10. 06:09

0,007초를 단축하라!

 

'또 올림픽 이야기를 하나 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0.007초면 눈을 한 번 깜박일 때 걸리는 시간(약 0.2초)의 30분의 1밖에 안 되는 순간이다. 그런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 문제가 되는 분야가 스포츠 말고 또 있다.

파생상품을 매매하는 국내 트레이더들이 부산 인터넷데이터센터(IDC)에 입주한 증권사로 옮겨가고 있다. 파생상품 거래 시스템의 메인 서버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서울보다 부산에서 주문을 넣는 편이 0.007초 정도 빠르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이 중요한 건 고빈도매매(HFT·High Frequency Trading)의 확산과 관련이 있다. HFT는 미리 짜여진 컴퓨터 알고리즘에 따라 주식이나 파생상품 매매가 자동으로 이뤄지며 극도로 짧은 시간에 대량의 주문과 체결이 거듭되는 방식이다. 국내에선 거래 수수료가 없는 파생상품이 주로 대상이지만 미국에선 일반 주식거래의 절반이 넘을 정도로 퍼져 있다. 주문과 체결을 무한정 반복하며 거래량을 늘리기 때문에 수익 규모가 크다.


국내 파생상품 시장에선 인간 대 컴퓨터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 진영은 국내 증권사 상품운용팀, 컴퓨터 진영은 알고리즘으로 거래하는 미국계 금융회사들이다. 인간 진영의 한 사람인 A 씨는 테트리스 게임을 마지막 판까지 쉽게 깰 정도로 빠른 손놀림과 판단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최근 5년간 연평균 100억 원을 벌던 그조차 요즘 잃는 날이 많다고 한다. 증권가의 한 인사는 “한국거래소(KRX)의 옵션 시세 처리 속도가 몇 년 새 7배 가까이 빨라진 것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속도전이 벌어지면 인간이 절대 열세다. 육안으로 모니터에 나타난 변화를 인식하는 데는 3분의 1초 정도가 걸린다. 만약 거래가 초당 수백 건, 수천 건 이뤄지면 인간은 가격 변동을 인식하는 것조차 어렵다. 가격에 대한 판단이나 순간적인 대응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컴퓨터는 미세한 변화 하나하나에 대응해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최근에는 전 세계 주식거래의 상당 부분이 인간의 판단력이나 이성이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HFT를 주로 하는 금융회사들은 매매 전략을 아예 칩에 심기까지 하며 조금이라도 속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램이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등의 장치를 거치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 가까운 곳으로 옮겨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은 물론이다.

독일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플로리안 오비츠가 쓴 ‘슬로우’에는 로이터통신의 정보 처리 속도와 양에 놀란 이야기가 나온다. 로이터는 매일 뉴스 기사 7000여 건 외에도 런던 뉴욕 홍콩에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증권 시세와 환율 정보를 24시간 공급한다. 로이터 매출의 90%는 투자은행(IB) 같은 금융권에서 나온다. 이들은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를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빠르게 분석한 뒤 실시간 대응해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은 컴퓨터가 인간의 지성과 판단력을 따라올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왔다. 인간과 벌인 체스와 퀴즈 대결에서 컴퓨터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화제였다. 하지만 금융 시장에선 인간과 컴퓨터 사이에 속도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에 승산이 없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서글픈 경쟁이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인간끼리 벌이는 속도 대결이 새삼 아름답게 보인다.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동아일보 2012. 8. 10.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