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錫珉 기자 칼럼

<책갈피> 아내들의 일생

洪 海 里 2012. 9. 19. 05:12

 

아내들의 일생

 

  필자가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게 됐을 때 아내는 직장을 그만뒀다. 방법을 굳이 찾으려 하면 1년을 쉬고 다시 복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된 직장생활에 지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하나이고 유치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처가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맞벌이 생활을 이어 갔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나자 양자택일의 상황이 왔다. 남편보다 연봉이 많은, 자기 나름으로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기에 일과 가족 가운데 선택할 것을 강요받았을 때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그 깊은 고민을 감히 묻지 못했다.

  얼마 전 방한한 페이스북의 셰릴 샌드버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그리고 가장 바쁜 여성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오후 5시 반이면 퇴근해 아이들과 시간을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샌드버그 COO는 기자 간담회에서 “지금까지 여성들은 커리어와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고 전제한 뒤 한국 여성들에게 “큰 꿈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당신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다고 믿어라”라고 조언했다. 이 대목만 놓고 보면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로 들린다. 꿈과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슈퍼 우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미국도 직장 맘이 가정을 챙기는 것은 쉽지 않다. ‘남성의 종말’의 저자인 해나 로진 씨는 워싱턴포스트에 근무하던 시절 첫째를 가진 직후 얼마간 주 4일 근무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고 적었다. 오후 6시 15분쯤 슬그머니 퇴근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근처에 코트를 미리 숨겨 놓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학부모 면담에 가기 위해 상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례도 많다고 했다.

  한국의 현실은 훨씬 더 어렵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한국 고용의 현주소’ 보고서에 따르면 25∼54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주요 선진국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25∼29세)에서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7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수준이지만 30대에선 55%로 급락한다. OECD 평균은 연령대와 무관하게 70%선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예 일을 포기하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선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롯데그룹이 최근 여직원들이 출산휴가 뒤에 자동으로 육아휴직에 들어가게 한 것은 좋은 사례다. IT를 활용해 시공간적 유연성을 높이는 것도 방법이다. 재택근무와 스마트워크가 확산되면 여성은 물론 직장 남성들이 가사 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도 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전업 주부들의 운신의 폭도 넓어져 유급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전통적으로 남성 위주의 제조업 대신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적응력이 중요한 서비스 산업이 부상하고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덕목들이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유독 적은 것이 미래의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비약일까. 개별 기업의 노력뿐 아니라 국가 차원의 비전과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아내들의 인생을 OECD 수준으로 올려놓을 후보가 누구일지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관전 포인트다.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동아일보 2012. 9. 19.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