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에 서서 /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독 / 洪 海 里
네 앞에 서면
나는 그냥 배가 부르다
애인아, 잿물 같은
고독은 어둘수록 화안하다
눈이 내린 날
나는 독 속에서 독이 올라
오지든 질그릇이든
서서 죽는 침묵의 집이 된다.
사랑에게 / 洪 海 里
써레질을 잘 해 놓은 무논처럼
논둑 옆에 기고 있는 벌금자리처럼
벌금자리 꽃이 품고 있는 이슬처럼
이슬 속 천년의 그 자리 그냥 그대로.
난초 이파리 / 洪 海 里
부러질 듯 나부끼는 가는 허리에
천년 세월이 안개인 듯 감기고
있는 듯 없는 듯 번져 오는 초록빛 황홀
해 뜨고 달 지는 일 하염없어라.
세란헌洗蘭軒 / 洪 海 里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
갯벌 / 洪 海 里
노을이 타는
바닷속으로
소를 몰고
줄 지어 들어가는
저녁녘의
女人들
노을빛이 살에 오른
바닷여인들.
꽃 / 洪 海 里
이승의 꽃봉오린 하느님의 시한폭탄
때가 되면 절로 터져 세상 밝히고
눈 뜬 이들의 먼 눈을 다시 띄워서
저승까지 길 비추는 이승의 등불.
새벽 세 시 / 洪 海 里
단단한 어둠이 밤을 내리찍고 있다
허공에 걸려 있는
칠흑의 도끼,
밤은 비명을 치며 깨어지고
빛나는 적막이 눈을 말똥처럼 뜨고 있다.
* 시에 대한 짧은 생각 그간 나온 시집『投網圖』(1969)로부터『비밀』(2010)까지 15권의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짧은 시 8편을 골라 보았다. 이번 과정에서 그동안 쓴 시 가운데 짧은 시가 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는 쉽고 짧고 재미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다. 시는 한번 읽고 나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시는 읽고 난 후에 생각에 젖게 하고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아니면 짜릿하게 파문을 일으키든가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시는 시이고 시인은 시인이어야 한다. 왜 詩이고, 시를 쓰는 이는 왜 '詩家'가 아니고 '詩人'인가? '家'가 아니고 '人'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시는 말씀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말인 경전이어야 하고 시인은 작품을 만드는 장인이 아니라 시를 낳는 어미여야 하기 때문이다. - 洪 海 里
* http://blog.daum.net/jib17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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