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시> 洪海里의 짧은 시편 모음

洪 海 里 2012. 8. 28. 11:57

 

 

가을 들녘에 서서 /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독 / 洪 海 里

네 앞에 서면
나는 그냥 배가 부르다

애인아, 잿물 같은
고독은 어둘수록 화안하다

눈이 내린 날
나는 독 속에서 독이 올라

오지든 질그릇이든
서서 죽는 침묵의 집이 된다.

 

 

 

사랑에게 / 洪 海 里

 

 

써레질을 잘 해 놓은 무논처럼

 

논둑 옆에 기고 있는 벌금자리처럼

 

벌금자리 꽃이 품고 있는 이슬처럼

  

이슬 속 천년의 그 자리 그냥 그대로.

 

 

 

 

난초 이파리 / 洪 海 里

 

 

부러질 듯 나부끼는 가는 허리에

천년 세월이 안개인 듯 감기고

있는 듯 없는 듯 번져 오는 초록빛 황홀

해 뜨고 달 지는 일 하염없어라.

 

 

 

 

세란헌洗蘭軒 / 洪 海 里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내 몸에 끼는 덧없는 세월의 티끌

부질없이 헛되고 헛된 일이 어리석구나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차다.

 

 

 

 

 갯벌 / 洪 海 里

 

노을이 타는
바닷속으로

소를 몰고
줄 지어 들어가는

저녁녘의
女人들

노을빛이 살에 오른
바닷여인들.

 

 

 

 

꽃 / 洪 海 里

 

 

이승의 꽃봉오린 하느님의 시한폭탄

때가 되면 절로 터져 세상 밝히고

눈 뜬 이들의 먼 눈을 다시 띄워서

저승까지 길 비추는 이승의 등불.

 

 

 

    

새벽 세 시 / 洪 海 里

단단한 어둠이 밤을 내리찍고 있다
허공에 걸려 있는
칠흑의 도끼,
밤은 비명을 치며 깨어지고
빛나는 적막이 눈을 말똥처럼 뜨고 있다.

 

 

 

 

* 시에 대한 짧은 생각

그간 나온 시집『投網圖』(1969)로부터『비밀』(2010)까지 15권의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짧은 시 8편을 골라 보았다.

이번 과정에서 그동안 쓴 시 가운데 짧은 시가 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는 쉽고 짧고 재미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다.

시는 한번 읽고 나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시는 읽고 난 후에 생각에 젖게 하고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아니면 짜릿하게 파문을 일으키든가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시는 시이고 시인은 시인이어야 한다.

왜 詩이고,

시를 쓰는 이는 왜 '詩家'가 아니고 '詩人'인가?

'家'가 아니고 '人'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시는 말씀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말인 경전이어야 하고

시인은 작품을 만드는 장인이 아니라 시를 낳는 어미여야 하기 때문이다.

                                                                                              - 洪 海 里

 

 

 

 * http://blog.daum.net/jib17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