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가곡·문화글판·기타

<걸개詩> 부산 문화글판 /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2012. 9. 28. 11:57

 

 

* 부산시청 26층 건물중 12~13층 동쪽외벽에 내건 27m x 8m(65평) 크기의 '문화글판'

   2012년 9월 15일부터 12월 14일까지 3개월간 게시.

 

 

 

 

 

가을 들녘에 서서 /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시집『푸른 느낌표!』(2006)

 

 

  * 마음을 버리면 스스로 빛이 납니다.

  옛날 어떤 올곧은 분이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 하여 귀를 씻고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 오지요.

사실 시끄러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눈감고 귀 막고 사는 것도 한 좋은 방법이라고 할 겁니다.

그렇지만 산다는 게 어디 그리 뜻대로만 되는가요.

눈 감아도 귀 막아도 들려올 건 다 들려오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가지 묘책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미움을 모두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고, 다시 가슴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새 마음이 샘물처럼 초록초록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보다 자연이 더 지혜롭다는 것을 깨닫곤 합니다.

 저 가을 들녘을 보십시오.

 한 해 동안 열심히 땀 흘리다가 풍요로운 가을걷이 끝내고 나면,

그냥 그렇게 무심한 마음으로 겨우내 자신을 텅 비워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연은 우리들에게 큰 스승일 수밖에요.

  

  우리도 더 가을 들녘의 자세와 마음을 배워야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위해, 또한 이웃을 위해 노력하면서 마음속에 부질없는 생각들을 비워야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눈물겨운 마음자리가 오히려 스스로 빛나지 않겠습니까?

                                                             -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국문과 명예교수)

 

  * 연암 선생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눈과 귀만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병이 된다고 했다.

외물外物에 현혹되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걸 보고, 듣고 싶은 걸 듣는다는 이야기도 부정하긴 어렵다.

 

  눈과 귀는 선입견과 오류의 온상인 데다 욕망이 들어오는 창구이기도 하니 시인의 말처럼 “눈멀고”, “귀먹으면” 어떨까 싶다.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에 따라 눈과 귀를 보완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절실한 일이지만 시인은 그 마음마저 버리라고 한다.

집착하는 마음, 소유하려는 마음,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의미로 와 닿는다.

“텅 빈 들녘”는 시인이 지향하는 마음자리다.

다 버리고, 다 주어버리고, 눈과 귀가 방해되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 있고 싶은 거다.

                                                     - 이동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