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시>『독종』의 시편

洪 海 里 2012. 11. 28. 09:59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홍해리 시집『독종』을 집어들었다.

 

지난번에 접어둔 ‘독종’에서

더 진도를 나갈 참이다.

 

근래 들어 달관하듯 써내려간 시가

좋아, 서너 번씩 되새김질 해본다.

 

여기 몇 편을 옮겨

금목서 꽃과 함께 올린다.

 

 

 

 

♧ 난과 수석壽石

 

 

한때 나는 난초에 미쳐 살았다

그때 임보 시인은 돌을 안고 놀았다

 

내가 난을 찾아 산으로 갈 때

그는 돌을 찾아 강으로 갔다

 

내가 산자락에 엎어져 넝쿨에 긁히고 있었을 때

그는 맑은 물소리로 마음을 씻고 깨끗이 닦았다

 

난초는 수명이 유한하지만

돌은 무한한 생명을 지닌다

 

난을 즐기던 나는 눈앞의 것밖에 보지 못했고

그는 돌을 가까이하여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의 시는 찰나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의 작품에는 영원의 향수가 향기롭게 배어 있다

 

한잔하면 나는 난초 잎처럼 흔들리는데

그는 술자리에서도 바위처럼 끄떡없다

 

난과 수석이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조화란 어떤 것인가, 차이는 또 무엇인가

 

눈 밝은 가을날 석란화 한 점을 들여다보며

넷이서 마주앉아 매실주 한잔 기울이고 있다.

 

 

 

 

♧ 집을 수리하며

 

 

늦은 가을날

유방도 심장도 자궁도 다 버린

앙상한 몸 퀭한 가슴에 찬바람이 와 젖는

폐허에 배를 대고 십팔박十八泊을 했다

나도 집처럼 금 가고 이 빠진 늙은 그릇

한평생 채웠어도 텅 빈 몸뚱어리였다

집도 비어서야 비로소 악기가 되었다

바람이 지나가면 노랠 부르고

비 오는 밤에는 거문고처럼 울었다

달밤에도 잘 보이던 것들이

창문을 다 떼어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 굽고 꺾이면서 틈새를 날리고

집은 얼마나 많은 곡曲과 절折을 염장했을까.

하잘것없는 것들!

쓰잘데없는 것들!

보잘것없는 것들!

 

버리고 비워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오래 된 집을 위하여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질곡桎梏에 매이고 있는가

30년 만에 집수리를 하면서.

 

 

 

 

♧ 눈 내린 아침에

 

 

마음이 너무 무겁고

몸도 많이 어두웠구나.

 

이제는

빈 그릇이 되어,

 

쓸지 않은 눈밭으로

내 안의 지옥을 찾아,

 

점 하나 찍고

선 하나 그을 밖에야!

 

 

 

 

무극장락無極長樂

 

 

악을 써도 시는 써지지 않는다.

악이 악樂이 되어야 시가 선다.

 

날것인 말로 꽃도 달고 열매도 맺게 하라.

그물에 꽂힌 은빛 멸치의 몸부림으로

네 뜰에 꽃이 피거든 안부 전해 다오.

풀에 나무에 열매 달리거든 손 모아 절하거라.

 

마음 하나 늘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함부로 몸 열어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게 하라.

네 입맞춤으로 눈 번쩍 뜨이는 봄날이라고

허공대천을 마구 내닫지 말거라.

 

낙락한 마음으로

가다가 빨간 신호등도 마주쳐야 된다.

바락바락 악을 쓴다고 안 될 일 될 일 없다.

한 편의 시도 ‘그냥’ 좋으면 ‘그만’이다.

 

 

 

 

 

♧ 층꽃풀탑

 

 

탑을 쌓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도 간절하면 몸이 흔들려

한 층 한 층 탑사塔寺를 짓는다.

층꽃나무를 보라,

온몸으로 꽃을 피워 올리는

저 눈물겨운 전신공양.

해마다 쌓고 또 허물면서

제자리에서 천년이 간다.

나비가 날아와 몸으로 한 층 쌓고

벌이 와서 또 한 층 얹는다.

 

스님은 어디 가셨는지

달빛 선정禪定에 든 적멸의 탑,

말씀도 없고 문자도 없는

무자천서無字天書 경전 한 채.

 

 

 

 

♧ 우화羽化

 

 

바닥을 본 사람은

그곳이 하늘임을 안다

위를 올려다보고

일어서기 위해 발을 딛는 사람은

하늘이 눈물겨운 벽이라는 것을

마지막 날아오를 허공임을, 알고

내던져진 자리에서

젖은 몸으로

바닥을 바닥바닥 긁다 보면

드디어,

바닥은 날개가 되어 하늘을 친다

바닥이 곧 하늘이다.

 

 

 

 

 

♧ 세상의 아내들이여

 

 

오빠는 오라버니의 어린이 말이요

오라버니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남녀가 만나면 모두가 오빠가 되는 것인지

한배에서 먼저 태어난 남자와 결혼을 했는지

요즘 젊은 아내들은 한살되고 나서도

남편을 오빠, 오빠, 하고 징그럽게 부른다

한집에서 한솥엣밥 먹고 살다 보면

아내는 허리 없는 아줌마가 되고

길짐만 지던 남편은 아저씨가 되고 만다

우리 아저씨 우리 아저씨 하고 밀어내는

공동 소유의 촌수로 바뀌게 된다

몸이 가까울 때는 남매였던 사이

몸이 멀어지다 보니 관계도 뜸해져

항렬行列이 또 바뀌어 아저씨가 되고 만다

 

 

 

 

한솥밥 먹고 송사할 일도 아닌데

부부란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늙으면 아기가 된다 하니

아저씨가 더 나이를 먹으면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고 부를 것인가

세상의 아내들이여

서양사람들의 호칭처럼 달콤하지는 못해도

남편은 그대의 짝이 되어 사는 남자가 아닌가

젊어서도 남편은 남의 편이고

늙어도 남편은 내 편 아닌 남 편이란 말인가

이러다 그대들의 자식들 세대에는

딸이 제 오빠 보고 여보 당신 하지 않겠는가

오빠 동생이 자식을 낳으면 촌수는 어떻게 되고

호칭은 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들딸인가 아니면 조카인가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다.

 

 

 

* 한살되다 :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다, 두 물건이 한데 붙어 한 물건처럼 되다.

 

 


* http://blog.daum.net/jib17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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