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간 한라수목원 겨울 햇볕이 내려쬐는 순간
갑자기 환해진 느낌이 들어 주변을 살펴본즉 이 단풍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제주의 저지대에 있는 단풍들은 가을에 일교차가 크지 않고 저온으로 안 내려가
빨갛게 물들지 못하고 노랗게 된 것 같다.
이것 또한 독특한 모습인 듯싶어 올려본다.
홍해리 시인의 시집『독종』2부 ‘소금과 시’에서 시 몇 편을 옮겨 같이 싣는다.
♧ 편지
절정에 닿기 전 내려올 줄 아는 이
그의 영혼 내 처녀처럼 아름답다고
눈물 찍어 그대에게 연필로 쓴다.
산에 오른다고 바랑을 메고 다니면서도
아래 너른 세상을 어찌 못 보았던가
꽃도 활짝 피면 이미 지고 있어
넋이 나간 빈 집인데
나의 마음 한 자락 한 자락마다
고요처럼 그윽한 충만이었던가
한때는 정점이 가장 높고 너른 세상
지고의 삶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절정이란 한 점, 찰나일 뿐
위도 아래도 없고 앞도 뒤도 없다
바람 거세고 모래알 날리는 그곳
그립지 않은 것은 마음이 비어 있기 때문
사랑이란 찰나의 홀림
절정에 이르지 말고
불타는 성전이나 구경할 일이다.
나의 전부인 너를 사랑한다 자연이여, 우주여
이것이 시에 대한 내 영혼의 고요 문법이라고
그대에게 띄운다.
♧ 소금과 시
소금밭에 끌려온 바다가
햇볕과 바람으로 제 몸을 다 버리고 나서야
잘 여문 소금이 영롱하게 피어난다
맛의 시종인, 아니 황제인 소금의 몸에서
밀물과 썰물이 놀고 있는 소리 들린다.
소금을 기르는 염부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
수천수만 땀방울의 울력으로
바다의 꽃, 물의 사리인
가장 맛있는 바다의 보석이 탄생하듯이,
시인은 말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소금을 빚는 염부,
몇 달 몇 년이 무슨 대수냐면서
한 편의 시는 서서히 소금으로 익어간다.
어둔 창고 속에서 간수가 빠져나가야
달고도 짠 소금이 만들어지듯
서둘지 마라,
느긋하게 뜸을 들이며
가슴속 언어산의 시꽃은 열매를 맺는다.
♧ 달을 품다
눈이 부셔 잠을 깨니
미끈유월 스무하루 새벽 한 시
눈이 아팠다
열려진 창문으로 달이 들어와
내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고 있었다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걸어온 것이었다
단잠에 든 내 눈을 깨우고
슬몃 눈웃음을 띄고 있다
내가 못 가니 네가 왔구나
그래 나는 무작정 달빛 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하늘바다에 안긴 듯 황홀했다
향기로운 네 손에 이끌려
밤하늘 풀밭의 양 떼 모두 잠이 들고
별 몇 개만 보초인 듯 눈을 껌벅이고 있다
백중사리 지나 한가위 때나 너를 볼까 했다
노란 네 얼굴이 한층 명명청청明明淸淸해지면
그때 널 보고 싶었지만
짐짓 모른 체 할 수 없어 너를 안으니
어디선가 질척질척 고양이 우는 소리 들렸다
천강만산千江萬山을 품고 있는
저 환한 고요!
♧ 길과 시간
길이란 발자국이 쌓는 잘 다져진 탑이다
앞으로 가며 쌓고 돌아오며 또 한 층 올린다
어제 위에 내일을 쌓는 시간이란 것도 그렇다
겨울 속에 여름이 있고 가을 속에 봄이 있듯
시작도 끝도 없는 푸른 생명은 어떤 것일 뿐
아무리 쌓아올려도 낮은 자리는 낮은 자리라
길이나 시간이나 높이가 없다
길은 길일 뿐이고 시간은 시간일 뿐인데
너는 길 위에서 부질없이 시간을 말한다
길은 발자국의 흔적이고
시간은 마음의 상처라서 늘 아프다
그래도 나는 너에게 가는 길
풍경과 더불어 아름다운 곡선길이고 싶다
시간은 살아 있어 추억으로 꽃을 피우니
나는 너의 안에 든 시간이라면 좋으리
뱀은 긴 직선의 몸으로 한평생을 곡선으로 긴다
하늘을 가는 새도 곡선으로 날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을 보라
곡선으로 날아가 명중하지 않는가
직선은 곧고 반듯하게 죽어 있다, 해서
너에게 가는 길이 구불텅구불텅한 길이라면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이라면 좋겠다
높이도 없이 높고 높아서
한평생 네가 보이지 않는.
♧ 그늘과 아래
그늘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늘이 그늘그늘 드리워진 곳은 어디인가
그늘은 늘 아래 존재한다
그늘은 미끄러워 잡히지 않는다
그런 걸 알면서도 나는 ‘그늘 아래’라고 겁 없이 쓴다
그늘에 아래가 있는가
그러면 그늘의 위는 어디인가
그래 어쩌자고 나는 그늘 아래로 파고드는가
그냥 그늘 속으로 기어들지 않는 것인가
그늘은 무두질 잘 해 놓은 투명한 가죽이다
그늘에서 가죽에 막걸리를 먹여야 좋은 소리가 난다
그늘의 소리가 배어 있다 나온다
그늘북은 슬픔이다
그게 아니다
그것은 젖어 있는 팽팽한 희망이다
그래 나는 늘 그늘이고, 아래에 있고 싶다.
♧ 줄 또는 끈
줄도 끈도 없어 살길이 막막할 때
가늘게라도 비비거나 꼰 벌잇줄 하나 있었으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는 면했을 것인가
너와 나를 이으려고
술로 말로 줄을 매려고 마음 출렁인 적은 없었던가
그러나 한잔 술에 취하면
그건 금방 풀어지는 끈이었어
끈에는 끊어지는 속성이 있지만
가장 질기고 속된 성스러운 줄도 있는 줄 몰랐다
살아 있는 줄, 탯줄 같은
줄을 잡고 한평생 매달렸다면
노끈이나 줄끈이 아닌 명줄이나 길었을까 몰라
쓸데없는 삭아버린 철끈이나 동아줄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철綴끈이 철鐵끈이기를 바라면서
줄꾼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나는
발끈해서 앞뒤 분간도 못하지 않았던가
따끈하지도 화끈하지도 못하고
밤낮 이런 저런 일에 질끈 눈이나 감아 주면서
매끈하게 줄을 타는 연습도 하지 않았지
줄을 타겠다고 끈끈이처럼 매달려 있지 말고
줄이나 끈을 달라고 엎드려 빌어나 볼 일인가
이것저것에게 끈끈히 달라붙어 줄줄이 빌 일인가.
♧ 덤덤담담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신다
바람 불면 귀를 열고 눈 내리면 부처 된다
졸리면 자고 일어나선 발바닥을 두드린다
보고프면 만나고 아니면 그만이다
꽃이 피면 한 잔 하고 새가 울면 춤을 춘다
뒤진들 어떻고 뒤처진들 어쩌랴
느릿느릿 서두를 것 하나 없다
마음이 집이고 절이니 시고 때도 없다
세상에 죽고 못 살 일이 어디 있나.
♧ 망망茫茫
- 나의 詩
널
관통하는
총알이 아니라
내 가슴 한복판에 꽂혀
한평생 푸르르르 떠는
금빛 화살이고 싶다
나의 詩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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