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錫珉 기자 칼럼

드라이 재뉴어리

洪 海 里 2012. 12. 10. 07:01

드라이 재뉴어리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꼭 2년 전이었다. 2010년 12월 시애틀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니콜 브로더 씨는 칼럼에서 지인이 몇 년째 1월 한 달간 금주를 실천하고 있다며 본인도 동참하겠다고 썼다. ‘드라이 재뉴어리’는 술을 마시지 않는 1월이라는 의미다. 질펀한 12월을 떠나보내고 새해를 시작하는 첫 달은 메마른 상태로 지내자는 것이다. 단 한 잔, 아니 단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겠다는 실천 운동이다. 칼럼에서 ‘몇 달만 있으면 50줄에 접어드는데 건강하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깨끗한 정신이야말로 멋진 출발점으로 보였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술에 취해 넋두리처럼 쏟아내던 말들, 필름 끊김, 숙취로 퀭한 출근길, 멍하게 보내는 오전, 반성, 그러나 도돌이표처럼 저녁이 되면 다시 눈이 반짝거리던 하루하루…. 그래,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맑은 정신, 삶에 대한 태도가 더 문제다. 한 달쯤 술을 끊어보자.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11년엔 할까 말까 망설이다 며칠 만에 파계. 올해 1월엔 주위에 선언 비슷한 것을 했음에도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브로더 씨의 칼럼에서 딱 일주일만 지나면 평소 얼마나 자주 술을 마시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는 대목이 실감 났다.


드라이 재뉴어리 운동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취지가 전해지면서 매년 조금씩 참여자가 늘고 있다. 올해 영국에선 드라이 재뉴어리 공식 사이트까지 생겼고 9일 현재 658명이 실천하겠다고 사인했다.

금주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심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결행하기가 만만치 않다. 서구에선 음주 행위가 19세기까지 공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작업장 내 음주가 보편적이었고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농사일을 하던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집에서 일꾼을 사서 일을 하려면 휴식시간에 술을 내는 관행이 남아있다. ‘퇴근 후 한잔’이라는 말이 확산된 것은 음주 행위가 개인의 여가생활이며 사적인 영역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회사원에게 금주는 여전히 조직의 눈치를 보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 행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의지다.

주위를 둘러보면 꼭 1월이 아니라도 기간을 정해놓고 금주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대기업 회장은 매년 11월 한 달 동안 금주한다. 내년 경영계획을 짜는 11월은 기업에선 가장 바쁜 동시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명징한 정신으로 의사판단을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사람을 만나는 게 주된 업무인 한 기업체 임원은 특정한 달을 정하지 않고 연중 한 달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해 실천하고 있다. 알코올과 카페인 섭취 행위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저술가 스티븐 브라운 씨는 알코올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필요할 때는 즐기되 정신이 맑고 예리해야 할 때는 피한다는 것이다.

드라이 재뉴어리는 음주 생활에 쉼표를 찍자는 얘기다. 마침표가 아니다. 드라이 재뉴어리 사이트에선 금주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피부도 좋아지고, 체중을 줄일 수 있으며, 심지어 돈도 아낄 수 있다고 적어놓았다. 한 달간 아낀 술값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해 쓰는 것. 한 해 시작으로 제법 근사하지 않을까.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동아일보 2012. 12. 10.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