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집중조명 자료

<테마 소시집> 난초꽃 한 송이 벌다 외 9편

洪 海 里 2013. 6. 20. 05:45

 

<테마가 있는 소시집>

 

 

 

난초꽃 한 송이 벌다 외 9

 

 

홍 해 리

 

 

처서가 찾아왔습니다 그대가 반생을 비운 자리에 난초
꽃 한 송이 소리 없이 날아와 가득히 피어납니다 많은
세월을 버리고 버린 물소리 고요 속에 소심素心 한 송
이 속살빛으로 속살대며 피어납니다 청산가리 한 덩이
가슴에 품고 밤새도록 달려간다 한들 우리가 꽃나라에
정말 닿을 수 있겠으랴만,

피어나는 꽃을 보고
그대는 꽃이 진다 하고
나는 꽃이 핀다 하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목숨은 피어나는데……,

참 깊은 그대의 수심水深
하늘못이네.

우리가 본시부터
물이고 흙이고 바람이 아니었던가
또는 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물빛과 하늘빛 속에는 불빛도 피어나 황토빛
내음까지 실렸습니다 올해에도 여지없이 처서가 돌아
와 산천초목들이 숨소리를 거르는데 늦꽃 소심 한 송
이 피어 깊이깊이 가슴에 들어와 안깁니다.

푸르르르르 백옥 같은 몸을 떨며 부비며 난초꽃 한 송
이 아프게 피었습니다.

 

 

 

 

난이여 사랑이여

 

 

  부시게 마음이 가벼운 봄날 먼지 알갱이 하나에 천년
굴을 파다 문득 하늘에 날아가는 한 마리 새를 보네
한평생을 사는 것이 모래 한 알밖에 아니 먼지 알갱이
에 더하겠느냐 땀 한 방울도 못 되는 목숨으로 살아가
면서 악머구리로 세상이 시끄럽게 울어쌓아도 제자리
에서 제때에 푸르게 몸 떠는 목련꽃의 무심한 하양을
보아라 사랑이여 세상에 서럽지 않은 애달프지 않은
아프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겠느냐 쓰라린 상처 하나
없는 사람 세상에 어찌 홀로 설 수 있겠느냐 보드라운
봄밤이 꿈결같이 펼쳐지고 눈 안으로 빨려드는 저 먼
산자락의 달빛 별빛 그리고 가늘게 흐르는 바람의 희
미한 그림자 사이로 너무 멀리 가버린 가슴속의 풀꽃
향기 입술에서 다시 살아날 때 버선발로 달려나올 진
달래 꽃잎 같은 사랑을 보아라 두견새 한 마리 날아와
온 산천을 흔들 때면 목숨 가진 것들마다 퍼렇게 멍이
들어 온몸으로 발광하는데 소리 없는 소멸 속에서도 찬
란히 피어나는 느릅나무 속잎이나 원추리 새순 같은
것이나 또는 찬란한 추락이 아닌 부리 노란 새새끼의
첫 비상도 저 부신 햇빛 속에 빛나고 있음을 ㅡ 그러
면 알리라 사랑도 상처로 씻고 눈물로 씻어서 드디어
빛나는 별이 되는 법을 겨울 개울 물소리를 들어보면
눈 내린 어둡고 깊고 춥던 바람소리 설해목 우지지던
새들 노루들 꽁꽁 얼어붙던 밤 다 지나고 이제야 목이
터져서 봄날 아지랑이 아른아른 오르내리고 비 오고
물안개 버들개지 틔우니 꽃구름이 꽃비 뿌려 그것을
뒤집어쓴 우리도 꽃이 되어 하늘로 하늘하늘 날아오르
는 것을 그리운 마음의 날개를 타고 한나절의 세상살
이 따뜻하게 다지고 다지는 것을 ㅡ 난이여 그대를 가
만히 들여다보면 쓸쓸한 슬픔이 아침 햇살처럼 이파리
마다 젖어오느니 늘 푸르거라 난이여 사랑이여!

 

 

 

 

 

 

무위無爲

 

 

 

너는

가득 차 있어
네 앞에 서면
나는
비어 있을 뿐ㅡ


너는 언제나 무위의 시
무위의 춤
무위의 노래
나의 언어로 쌓을 수 없는 성


한밤이면
너는 수묵빛
사색의 이마가 별처럼 빛나, 나는
초록빛 희망이라고
초록빛 사랑이라고
초록빛 슬픔이라고 쓴다


새벽이 오면
상처 속에서도 사랑은 푸르리니
자연이여
칠흑 속에 박힌 그리움이여


화성華星의 처녀궁에서 오는
무위의 소식
푸른 파도로 파도를 밀면서 오네.

 

 

 

 

 

 

 

연지비枝比翼

 

 

 

 

난을 사랑한다 함은
우주를 품어안음이니,

바위 깊이 수정 지주를 세우고
지상에 녹색 보석 궁전을 지어
반야의 길을 찾아 천리길을 나서네
푸른 잎술에서 나는 향그런 풍경소리
깊숙이서 차오르는 영혼의 노래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리움에 목이 젖으면
떼기러기 띄우고 해와 달 엮어
기인 목 뽑아 눈물 같은 향 피우네
천지간에 사무치는 한넋으로
돌아보는 세상은
늘 저만치 비켜서 있고
차가운 불길 가슴을 태워,

그리고 그리는
연지비익枝比翼이여!

 

 

 

 

 

난 앞에 서면

 

 

 

천상천하의
바람도 네 앞에 오면
, 소리 없는 춤이 된다
시들지 않는 영혼의,
적멸의 춤이 핀다

별빛도 네게 내리면
초록빛 에메랄드 자수정으로
백옥으로 진주로
때로는 불꽃 핏빛 루비로 타오르고
순금이나 사파이어 또는 산호
그렇게 너는 스스로 빛나는데
난 앞에 서면
우리는 초라한 패배자
싸늘한 입김에 꼼짝도 못한다
언제 어디 내가 있더냐
일순의 기습에 우리는
하얗게 쓰러진다

천지가 고요한 시간
우리의 사유는 바위 속을 무시로 들락이고
때로는 하늘 위를 거닐기도 하지만
무심결에 우리를 강타하는
핵폭탄의 조용한 폭발!

드디어 우리는
멀쩡한 천치 백치 ……
가장 순수한 바보가 된다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춤사위에 싸여
조용히 조용히 날개를 편다.

 

 

 

 

 

 

난꽃이 피면

 

 


아무도 가지 않은 눈 위를
가고 있는 사람
모든 길이 눈 속으로 사라지고
길이 없는 이승을
홀로서 가는
쓸쓸한,
쓸쓸한 등이 보인다.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어 있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의 중심中心
실한 무게의 남근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삼경 이러 네 곁에 서면

어디서 먹 가는 소리 들리고

꽃빛 심장을 드러낸 바람과

바닷소리도 홀홀 날려오느니.

 

별과 달과 모래알과

나무 등걸이 모여

정한 물 한 대접에

얼굴을 비추어 보고 있다.

 

소리 없이 부르는 노래

동양의 고전이여,

움직이지 않는 춤

초록빛 의미로 쌓는 꿈이여.

 

일어서다 스러지고

스러지다 일어서는

타다 남은 장작개비와

휴지조각들의 꿈을 위하여,

 

진홍의 혓바닥과

은빛 날개,

나부끼는 가는 허리

겨울밤을 홀로서 깨어 있느니.

 

 

 

 

 

 

춘란

 

 

 

 

남도 지방 깊은 골 구름도 걷고

겨우내 움켜잡던 까끌한 손길

보리밭 시퍼러이 일어설 때면

대숲으로 새 떼들 몰려 내리고

햇빛 속에 피어나는 허기진 바람

아아아 눈물로도 씻지 못하던

꺼끌한 혓바닥의 가락을 접어

꽹과리 장단에 목청도 뽑아라

어둡고 춥던 밤은 잊기로 하리

가난하여 부끄럽던 속살도 펴고

접어 넣던 소복도 꺼내 놓아라

힘줄 불끈 막걸리잔 손에 잡으면

한세상 사는 일이 헛되지 않아

불뚝 서는 남근처럼 꽃을 피운다.

 

 

 

 

 

 

 

 

 

 

 

 

천년

면벽한 비구의

화두요

 

무언의 말씀으로

올리는

넉넉한 기도

 

영혼의

녹색 언어로 읊는

서정시

 

소리 없이

천상의 악기로 타는

가락

 

푸른 마당에 벌이는

끝없는

춤사위

 

촛불 오르는 동안

풀어야 할

매듭이다.

 

 

 

 

 

 

 

 

 

 

 

 

 

뼈가 없는 네게는

뼈가 있는데

뼈가 있는 내게는

뼈가 없구나.

 

 

 

너는

겨울밤의 비수요

대추나무 가시

차돌맹이요

불꽃이다.

 

 

 

네게는

햇빛으로 피는 평화

햇빛으로 쌓는 역사

햇빛으로 웃는 사랑

햇빛으로 아는 진실

햇빛으로 보는 영혼

햇빛으로 타는 침묵

햇빛으로 엮는 약속이 있다.

 

 

 

네게는

바람으로 오는 말씀

바람으로 맞는 기쁨

바람으로 크는 생명

바람으로 얻는 휴식

바람으로 벗는 고독

바람으로 거는 기대

바람으로 빗는 무심이 있다.

 

 

 

네게는

물로 닦는 순수

물로 아는 절대

물로 사는 청빈

물로 비는 허심

물로 우는 청일

물로 빚는 여유

물로 차는 지혜가 있다.

 

 

 

네 발은 늘 젖어 있고

내 손은 말라 있다.

 

 

 

마른 손으로

너를 안으면

하루의 곤비가 사라지고

먼 산 위에 떠돌던 별, 안개

바람이 네 주변에 내려

 

 

 

내 가는 손이 떨리고

마취된 영혼이 숨을 놓는다.

 

 

 

고요 속에 입을 여는

초록빛 보석

살아 있는 마약인 너

 

 

 

십년 넘게

네 곁을 지켜도

너는 

여전히 멀다.

 

 

 

      - 월간《우리詩》2013.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