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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간이 펼쳐 보이는 꽃들의 사건 - 洪海里 꽃시집 『금강초롱』 / 손현숙

洪 海 里 2014. 1. 27. 08:00

<서평>

 

시간이 펼쳐 보이는 꽃들의 사건

- 洪海里 꽃시집 『금강초롱』

 

손 현 숙(시인)

 

 

 

   지상에 피어나는 꽃들은 환이다. 꽃은 피어나면서 동시에 죽음을 잉태한다. 흘러가는 물처럼 삶과 죽음의 순환은 끝이 없어서, 물이 펼쳐지는 그 순간 꽃봉오리는 몸을 열어 꽃의 시간을 불러온다. 그렇게 생명은 시간 속에서 아름답다. 그러나 무한의 시간은 두렵고 지루하다. 유한 속에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건은 불멸의 미의식과 함께 죽음 이후의 시간을 공감하게 한다. 영원히 사는 생명은 어쩌면 영원히 태어나지 못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존재로 증명되는 인류의 역사는 소멸하는 시간과 함께 생성한다. 존재는 생과 멸을 반복하면서 진화한다.

   진화의 과정은 필히 상처를 동반하는데, 상처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시의 싹은 시작이다. 상처는 흉터와는 달라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흉터는 시간과 함께 소멸이 가능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처는 영혼과 결부되면서 생을 결박시킨다. 그것들은 사랑이나 열정의 또 다른 무늬처럼 인간에게 낱낱의 고통을 남긴다. 역광으로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의 눈은 빛을 향해 오래 열려 있어야 하듯, 사람마다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하다. 따라서 시인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올바로 인식해야 하는 적극적인 존재다. 고통을 감당하는 용기는 시인에게 또 다른 삶을 펼쳐 보여주고, 그것은 또한 시의 시원이 된다.

   겨울이 봄을 잉태하듯 죽음은 또 다른 삶을 불러온다. 시인은 죽음의 본질을 바라보면서 인간과 사물의 간격을 좁힌다. 죽음에 대한 사유를 삶과 치환시키면서 삶과 죽음의 동질 의식을 부여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인의 진정한 고백은 아픔과 함께 현실을 가늠하게 한다. 시인이 보여주는 아픔의 실존은 인간 본질의 원형을 일깨워준다. 그렇게 시는 본질 속에 서서 실존을 드러내는 존재다.

 

   홍해리 시인의『금강초롱』은 꽃들의 향연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들이 계절을 망라하고 시집 속에 모여 앉았다. “내가 한 가장 위대한 일은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한 것이었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모든 꽃들 앞에 시인은 사랑을 고백한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이다. 결국 꽃은, 시인이 사랑한 혹은 사랑했던 연인, 즉 처음부터 거기 그 자리에 있었던 자연이다. 그리고 그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깊고도 그윽하다, 아니 고혹적이다. 늙지 않는 시인의 시선은 때로는 노골적이어서 “수줍은 많은 벼가 자지를 내밀고 있”다. 그 많은 열정과 연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유지하는 시인의 내공은 저 속 깊은 적막 “뚝” 모가지를 떨구는 동백꽃의 죽음을 이미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그에게 왔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꽃은 늘 그 자리 그곳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풍경이 가슴으로 들어와서 사랑이 되었듯이 꽃들도 시인의 마음 안 하늘 속으로 들어와서 시인의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꽃들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처음도 끝도 없이, 단단히 끝나거나 시작 할 기미가 없는 꽃들에 대한 사랑은 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꽃의 밖에서 평생을 서성이며 꽃의 안쪽을 기웃거렸던 시인. 죽음의 안쪽에서 삶의 바깥을 서성였다면 어떨까. 그렇게 그가 죽음을 불사하고 꽃에게 건너간 흔적은 다만 언어, 시로써만 가능했을 것이다. 문자로 건너갔던 사랑의 행위. 그것은 아마도 시는 사물의 본질 속에 서있다는 블랑쇼의 말처럼 시인이 몸소 수행했던 본질에 대한 탐험이 아니었을까.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세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때로는 원경에서 다만 바라볼 뿐이다가도 더러는 과감하게 “제발 죄받을 일이라도 있어야 겠다”며 저벅저벅 봄날 마음 둔 곳으로 눈독들이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시인은 꽃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거나 난폭했던 일은 없었다. 시인이 꽃을 바라보는 자세는 고운 여인을 대하는 듯 늘 “비밀보다 은밀하”게 고이 품어 펼쳐 놓는 “향”이다. 핀 적도 진 적도 없는 기억으로 번지는 은은한 향기. 시인의 여인들은 그렇게 꽃으로 환생해서 시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춤”처럼 시인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기꺼이 닿고 싶은 곳은 “닿을 수 없는 정갈한 정신의 벼리” 일 것이다. 슬프지 않은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인은 “별의, 하늘의, 우주의, 투명한 선문답”을 향해 매일 꽃들에게로 마음을 들인다.

 

꽃나무 아래 서면 눈이 슬픈 사람아

이 봄날 마음 둔 것들 눈독들이다

눈멀면 꽃 지고 상처도 사라지는가

욕하지 마라, 산것들 물오른다고

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

마음도 주기 전 날아가 버리고 마니

네게 주는 눈길 쌓이면 무덤 되리라

꽃은 피어 온 세상 기가 넘쳐나지만

허기진 가난이면 또 어떻겠느냐

윤이월 달 아래 벙그는 저 빈 자궁들

제발 죄 받을 일이라도 있어야겠다

취하지 않는 파도가 하늘에 닿아

아무래도 혼자서는 못 마시겠네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전문

 

 

   사랑은 가고 사람은 남아 있다. 지금은 윤이월, 달 아래 꽃이 벙그는 시간이다. 몸이 떠났을 때 사람은 마음으로 몸을 찾는 법. 지극하게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눈멀면 꽃 지고 상처도 사라”진다는 것을. 시인은 지금 꽃나무 아래 서서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연민이든 시간의 장난이든, 시인은 지나가버린 그것들을 연민한다. 눈이 슬픈 사람이란 눈에 눈물이 맺히는 사람일 것이다. 마음 둔 것들 모두 떠나가 버리고 지금 시인은 홀로 꽃나무 아래 서 있다. 눈독들이다 그만 눈이 멀면, 즉 보이지 않으면 사랑도 사라지는가? 반문한다. 반어법이 강하게 도래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더 짙은 연민으로 다가온다. “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 그것의 정체를 마음이라고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 마음들 쌓여서 무덤이 되어도 시인은 그냥 그 자리, 오늘을 지킨다.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의 사건. 저 빈 자궁 같은 시간 앞에서 시인은 “제발 죄 받을 일이라도 있어야겠다”는 고독을 맛본다. 맨 정신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곳. 사랑아!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꽃들의 사건은 속절없다.

 

담장을 넘는 일도 두렵지 않아

 

슬그머니 타넘다 들켜 버렸다

 

철조망에 속옷을 찢겨 버리고

 

알몸으로 빨갛게 울고 있어라. 

                   -「넝쿨장미」전문

 

   담장 위에 척, 몸을 걸친 넝쿨장미를 보라. 마치 월담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저 사람은 왜, 무슨 이유로 대문으로 몸을 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시인은 누구를 향해 몰래, 저리도 지독하게 다가가고 싶은 것일까. 그러다 그만 들켜버린 사연이란 또 무엇일까. 온통 궁금증을 낳게 하는 넝쿨장미다. 들켜서 버려지고, 찢겨서 버려지는 사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들키고 난 후의 시인의 심상은 그래, 우는 일 외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시는 리듬을 강조하면서 읽어야 제 맛이다. 3음보의 민요조로 읽다 보면 슬픔도 가락을 타면서 견딜만하다. 알몸으로 빨갛게 울어본 사연. 당신은 저런 기억 간직하고 계시는지?

 

 

국립4·19민주묘지

더디 오는 4월을 기다리는 수십 그루 매화나무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서 있다

지난여름 삼복 염천의 기운으로 맺은 꽃망울

4월이 오는 길목에서

그날의 함성처럼 이제 막 터지려 하고 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심상찮다

그날 젊은이들도 이랬으리라

지금은 관음觀音 문향聞香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방향을 잃은 별들처럼

무심하게 걸음을 재촉하며 헤매고 있다

한 시인이 있어

터트리는 꽃망울을 보며

절창이야, 절창이야, 꽃을 읊고 있다

연못가 버드나무도 연둣빛 물이 올라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중략>

 

그날의 핏빛 뜨거운 함성은 들리지 않고

총선이 다가온 거리마다

 

<중략>

 

나라를 구하라〔救國〕는 듯

먼산에서 산비둘기 구국구국 구슬피 울고 있다.

                      -「매화, 눈뜨다」부분

 

   4월이 되면 국립묘지 어느 한 곳에선 청매가 핀다. 오롯이 몰려 있는 청매의 군락은 총과 칼 앞에서도 절개를 지켰던 구국의 여인처럼 청아하다. 수유리에 오래 살면서도 그곳에 청매가 피었다는 소식 같은 거 모르고 살았다. 아니 청매가 왜, 청매인지. 왜, 청매가 아름다운지 따위에 대해서는 눈길도 돌리지 못하고 살았다. 어찌 보면 천박하고, 아니 삶이 단순했던 걸까. 어쨌거나 우연히 시인의 발길을 따라 청매 보러 국립4·19민주묘지에 간 적 있다. 조금 후미진 곳에 다소곳한 청매의 자태는 이상하게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뭔가, 잘못 살았던 것 같은 반성. 그런 꽃그늘 속에서 시인과 나는 오래, 그저 꽃을 보면서 문자향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이야기다. 그렇게 꽃받침이 푸르러서 청매가 되었다는 수유리 묘지에 핀 청매화의 꽃소식은 절창을 넘어선 득도의 경지였다.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서 있”는 조용한 함성 같은 꽃망울. 아주 오래 전 시인이 겪었던 4·19의 기억들은 여기 이렇게 꽃으로 돌아온다. 지금 사람들은 “방향을 잃은 별들처럼/ 무심하게 걸음을 재촉하며 헤매고 있”겠지만, 그날이 없었다면 오늘도 없을 터. 시인은 구국救國의 뜻에 대해 온몸으로 생각한다. 매화나무 아래 서성이면서, 그때의 오늘과 지금의 오늘에 대해 “그날의 핏빛 뜨거운 함성” 에 대해 “매화, 눈뜨”는 사건처럼 가만히 되새김한다.

 

   꽃 한 송이 바라보면서 나라를 생각하기도 하고, 어머니를 떠올리기도 하고, 지나간 사람을 길어 올리기도 하는 시인은 진정 꽃이란 어디서 온 것일까. 고민한다. 사랑이란 신기루 앞에 꽃과 별과 꿈에 대해 사색한다.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명자꽃」전문

 

   명자꽃은 귀신을 불러오는 꽃이라는 말이 있다. 기억을 불러오고, 사람을 과거 속에 서성이게 하는 꽃. 그래서 옛 선비들은 명자꽃을 마당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꽃의 힘.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것들이 다만 명자 꽃뿐이겠는가. 시인은 원래가 몽상가들이다. 시인의 몽상은 하늘 안 어느 곳에서도 꽃을 피우고, 구름을 불러와서 시간을 무화시킨다. 꿈과 별과 꽃들은 모두 시인의 손끝에서는 사람으로 의인화되기 마련이다. 시인이 그녀에게 가는 길은 꿈 길 외엔 길이 없다. 그런데 도무지 잠이 찾아오지 않는 오늘. 그녀에게 가는 길은 다시 막막해졌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 별 하나 지상에 밝게 켜 들고 앉아서 꽃을 기다리는 일. 그것을 시인은 사랑이라 믿는다. 별이 뜨지 않는 밤, 잠이 올 것인가. 잠들지 못하는 밤, 꿈이 찾아오려나. 시인의 사랑은 너무 멀어서 명자, 명자, 아무리 불러봐도 그 이름은 멀기만 하다.

 

 

그해 여름 산사에서 만난

쬐끄마한 계집애

귓볼까지 빠알갛게 물든 계집애

절집 해우소 지붕 아래로

해는 뉘엿 떨어지고

헐떡이는 곡두만 어른거렸지

저녁 바람이

조용한 절 마당을 쓸고 있을 때

발갛게 물든 풍경소리

파·르·르 파·르·르 흩어지고 있었지

진흙세상 속으로 환속하고 있었지.

                       -「해당화」전문

 

   사랑은 어쩌면 음악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시 속으로 흐르는 음악. 우주 만물의 지음과 돌아섬은 물결에 따라 이루어지는 소리의 향연. 그 소리의 향을 따라가다 보면 해당화는 분명 쬐끄마한 계집애다. 단 한 번도 해당화를 실물로 대하진 못했지만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해당화가 눈 안에 선연하다. 색은 발갛고 꽃잎은 얇아서 “파·르·르 파·르·르” 흩어지는 바람을 닮았겠다. 문자로 불러오는 꽃들의 묘사가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해당화는 절 마당이나 아주 조용한 곳, 또는 한갓진 어느 한켠에서 피고 지는 꽃인가 보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존재감이 흐리지도 않아서 가슴에 늘 품고 다니는 편지 같은 꽃. 시인의 시를 읽어가면서 꽃들의 모양새가 천천히 각인된다. 그렇구나, 내가 사는 이곳은 진흙별. 그 속으로 석고대죄하듯 천천히 돌아와서 우리를 기다리는 꽃, 해당화!

 

   꽃을 바라보는 자세는 홍해리 시인의 일평생이다. 시인은 꽃을 찾아 청춘을 탕진하기도 했다. 맨발로 우리 국토의 모든 산맥을 헤매면서 난을 살리기도 했고, 집안을 온통 난으로 채워 난의 아버지로 살기도 했다. 꽃과 시와 별과 술은 시인에게는 그저 삶이고 시간이고 이승에서의 업일지도 모르겠다. 꽃 보듯 사랑을 보고. 꽃 보듯 여자를 보고. 꽃 보듯 시를 만난다. 그저 가만한 몸짓으로 꽃을 보고 시를 만나고, 그리고는 다시 이별. 터럭 끝 하나 건드릴 줄 모른다. 가고 오는 인생을 그저 가만한 눈짓으로 바라보는 듯, 시인의 시선 속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별처럼 고독해서 매일 새벽 정화수처럼 몸을 일으키는 시인. 그의 시는 그렇게 순연하고도 정갈하다. 리듬이 있어서 노래를 부르는 듯하지만, 천만에 그것은 눈물. 함부로 흘리지 않는 시인의 고백이다. 그 고백들, 여기 가득 모여서 한 곳으로 흘러간다. 시간이 펼쳐 보이는 꽃들의 사건. 시인은 존재 너머, 너머의 꽃들에게 이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을 사랑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 시를 사랑한다는 시인의 고백은 진실해서 아프다. 그렇게 아픈 고백은 한 편의 절창으로 태어나서 세상의 꽃이 되었다. 금강초롱! 닿을 수 없는 먼 빛을 향해 몇 생을 통과하는 중이겠다.

 

1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2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금강초롱」전문

 

                                          - 월간《우리詩》2014.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