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박흥순 화백의 아호 '无山'과 나병춘 시인의 '下正'

洪 海 里 2015. 6. 16. 06:12

박 화백!

요즘 며칠 집에 칩거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면서 화백에게 아호를 하나 주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곰곰 꼽아보니,

 

'무산无山' 이 어떨까 하네.

이 말은 명나라 서하객徐霞客이란 사람이 황산을 오르고 나서

'登黃山 天下无山' 이라 한 데서 따온 것인데

뜻은 '황산에 오르고 나니 천하에 그만한 산이 없구나!' 일세.

 

아호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뜻을 지닌 것이 많네.

무산이란 말이 '山이 없다'(산이 뜻하는 것이야 많으니 무엇을 의미하든

상관이 없을 터)이니 괜찮은 아호가 아닌가 하네.

아호란 자고로 선배가 지어 주든가 스스로 지어 사용하는 것인데

몇 개를 가지고 사용하는 이도 있고 수백 개의 호를 가지고 산 분들도 많으니

한번 써 보는 것이 어떨까 하네.

이제 나이로 봐도 호를 사용한다 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마침 전화를 받고 메일을 보내니 읽어 보고 사용토록 하게나.

 

2015. 6. 15.

洪 海 里.

下正(나병춘 시인 아호)

나병춘 시인에게 하정이란 아호를 지어 주다.
노자의 말씀에 淸靜爲天下正에서 '下正'을 따온 말이다.
"청정한 것은 천하의 바른 것이 된다."
'正'의 의미가 크나 '下'자가 그것을 잡아 주리라 생각한다.
부디 좋은 시를 쓰는 바른 시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도덕경 제45장>대교약졸大巧若拙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 보여도, 그 쓰임에는 부족함이 없다.
완전히 찬 것은 비어 있듯이 보이지만,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
완전히 곧은 것은 약간 굽은 듯이 보이고
완전한 솜씨는 약간 서툴러 보이며
뛰어난 언변은 약간 어눌해 보인다.
움직임으로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으로 더위를 이기듯이
맑고 고요함으로 세상을 바르게 한다.

대성약결(大成若缺) 기용불폐(其用不敝)
대영약충(大盈若沖) 기용불궁(其用不窮)
대직약굴(大直若屈)
대교약졸(大巧若拙)
대변약눌(大辯若訥)
조승한(燥勝寒) 정승열(靜勝熱)
청정위천하정(淸靜爲天下正)

[蛇足]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는 말이 있다. 병법에서 적을 유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아군의 약함을 보인다는 뜻이지만, 비워야 실(實)답다는 말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아무리 그릇이 크더라도 가득 차 있는 그릇은 쓸모가 없다. 이처럼 노자의 말은 어렵지 않다. 도덕경의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바로 허(虛)이니 스스로를 비우라는 말이다. 그릇도 비워야 효용이 생기듯이, 마음도 비워야 그 쓸모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생각이 사라진 상태는 생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듯이, 아무리 비움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비우기 전에는 비움의 참된 의미는 알 수가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지만, 유일하게 사람 속을 알 수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마음공부에서 자기 자신만 속이지 않으면 이 공부는 반드시 익어가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안다. 스스로의 욕망과 집착이 사라졌는지 않았는지는 자기 자신만이 알지 않는가? 비록 체험을 했다고 하나,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은 쉽사리 조복이 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스스로 합리화시키지 마시라! 본성(本性)을 일견(一見)했다고 내키는 대로 하시는 분도 없겠지만, 이 공부의 승패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움의 실천에 달려 있다.

노자의 말씀은 담백하고 아주 평범해서 대단해보이지는 않지만 건강하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공부는 경전이던 누구의 말이던 보거나 들어서 이해한다고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모든 두려움과 욕망이 사라진 자리는 스스로 확인이 되는 자리지, 이해에 안주하고 있다면 종신(終身)토록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요원하다. 마음공부의 길에는 둘러가는 길도 없고, 지름길도 없지만, 스스로의 생각이 둘러가는 길도 만들고 지름길도 만든다. 최근에 많은 분들이 체험을 하고 있지만, 십중팔구는 체험 후에 생겨나는 미세한 생각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번뇌장(煩惱障)보다 소지장(所知障)을 넘기가 무척 어려운 까닭에 옛 선사들은 비인부전(非人不傳), 즉 처음부터 그릇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