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봄은 몸에서 핀다 外 6편 : 洪海里 / 이동훈(시인)

洪 海 里 2015. 11. 11. 09:21

그동안 선생님께서 공부하라고 주신 책에 짧은 감상글을 단 것이

마침 행운의 7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가정의 안녕과 복을 빌면서 좋은 시에 부족한 감상글을 한 줄에 세워 봅니다.

 

1.

봄은 몸에서 핀다

- 치매행致梅行 99 / 홍해리

   

 

몸에 뿔이 돋아나면 봄입니다

뿔은 불이요 풀이라서

불처럼 타오르고 풀처럼 솟아오릅니다

연둣빛 버들피리 소리

여릿여릿 풀피리 소리

속없는 사람

귀를 열고 닫을 줄 모르는 한낮

봄은 몸에서 피어나는데

봄이 봄인 줄 모르는 사람 하나

있습니다

꽃이 꽃인 줄 모르는 사람 하나

있습니다.

- 『치매행(致梅行)』, 황금마루, 2015.

   

 

* 임채우 시인은 발문에서 홍해리 시인을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수염 덥수룩한 노인에 견주며, “노인은 기력이 다하지 않는 한 바다로 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홍해리 시인에게 바다는 시(詩다). 험한 파도나 큰 물고기에 패배당할 시인은 아니지만 안에서 생긴 걱정이 격랑 되어 시인을 결박하고 상심하게 한다. 평생의 반려가 몸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서 위로, ㅁ에서 ㅂ으로 싹(촉이라 해도 좋고, 뿔이라 해도 좋겠다)을 내는 게 봄인데, 시인의 가정엔 봄이 사라졌다. 시인은 평생의 업인 시로 다시 봄을 불러오려고 한다. 말문을 닫은 아내에게 “마지막 선물 한 편”(<마지막 선물> 중에서)을 안기려는 일심으로, 매화 벙그는 데까지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몸의 아픔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묻노니/ 아내여,/ 봄이 오긴 오겠는가!”(<무제> 중에서) 탄식하며 몸과 봄 사이에, 불안과 희망 사이에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끝내 뿔을 내서 봄으로 가려고 한다. “머잖아 봄이 오는 소리 보는 듯 들리겠다”(<겨울 들녘>중에서)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앞서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패배하지 않았지만 바다 역시 그저 아득할 뿐이다. 시인은 어쩌면 노인과 바다를 함께 바라보는 소년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버들피리 불며 곡조 따라 떠다니고 싶은.(이동훈)

  

 

2.

먹통사랑 / 홍해리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 바퀴 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도 깜깜하다

살아 있을 때는 빳빳하나

먹줄은 죽으면 곧은 직선을 남겨 놓고

다시 부드럽게 이어진 원이 된다

원은 무한 찰나의 직선인 계집이요

직선은 영원한 원인 사내다

그것도 모르는 너는 진짜 먹통이다

원은 움직임인 생명이요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직선이 된다

둥근 대나무가 곧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듯

탄생의 환희는 빛이 되어 피어난다

부드러운 실줄이 머금고 있는

먹물이고 싶다, 나는.

- 시선집『비타민 詩』, 우리글, 2008.

 

* 먹통은 먹줄의 집이다. 짧은 거리를 재거나 표시할 때는 자가 유용하겠지만 길이가 제법 길어지면 먹줄이 제격이다. 먹통에서 줄을 뽑아가서 가볍게 튕겨주면 곧은 직선을 얻을 수 있다. 먹줄을 돌돌 말아 먹통 속 먹물에 재면 선명한 줄 자국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으니 요긴하게 쓰일 데가 많다. 먹줄 놓인 대로 자르거나 덧대면서 집 한 채 들어서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이런 쓰임새 말고도 먹통의 어둠과 감겨 있는 모양새에 주목한다. 자궁을 닮은 어둠이 생명을 키운다는, 세상의 원형이 직선을 낳고 다시 안아서 보듬어 준다는 발상을 먹통으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세상에 때 묻고 건조해진 채 귀가한 먹줄에게 물기를 전해줄 먹물이고 싶어 하는 따뜻한 인간애도 보여준다.

  먹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바보 먹통이라도 통하려는 마음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이동훈)

   

 

3.

수련睡蓮 그늘/ 홍해리

 

수련이 물위에 드리우는 그늘이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겠네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아니겠느냐

그 속에 들어와 수련꽃 무릎베개 하고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

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

천마天馬의 발자국들

수련잎에 눈물 하나 고여 있거든

그리움의 사리라 어림치거라

물속 암자에서 피워올리는

푸른 독경의 소리 없는 해인海印을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인다 한들

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

물에 잠긴 하늘이 마냥 깊구나

물잠자리 한 마리 물탑 쌓고 날아오르거든

네 마음 이랑이랑 빗장 지르고

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 두어라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


- 『독종』, 북인, 2012.

   

 

* 수련, 수련 그늘, 수련잎을 넘나드는 시인의 연주는 물탑을 세우는 일처럼 박력이 있으면서도 그 물탑이 잔상만 남기고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애잔한 느낌도 준다.

  수련 그늘은 수련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으니 그늘은 일차적으로 존재의 배경이 되고 존재를 환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후 존재와 상관없이 생명력을 얻은 그늘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기도 한다. 하늘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깊어지는 일이 그러하다. 수련잎도 그늘에 닿아 있으며 시에서 보이는 화자의 위상도 그늘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늘이 커질수록 공허해진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애초의 오롯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서이다. 참하게 앉은 수련은 더없이 이끌리는 존재일 것이다.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연인처럼, 아무리 애써도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진리처럼 품고 싶은 것은 언제나 한 발 먼 곳에 있다.

  산이 높으면 그늘도 깊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높아야 깊어지는 걸까. 그 구도의 길에서 그늘은 그늘로 자족하기도 하고 그늘이어서 서운하기도 하다. 그늘이 그늘을 고민하고, 그늘이 그늘을 지우며 비상하는 꿈은 천마로 상징된다. 이 시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수련잎 모양새에서 천마의 발자국을 연상하고, 천마의 발자국에서 해인海印을 연결하는 자유자재한 상상력이 놀랍다.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지만 시인이 드리운 그늘도 그 못지않게 깊어서 자꾸 아득해진다. (이동훈)

    

 

4.

참나무 그늘 / 홍해리

 

그가 단상에 앉아 있을 때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책처럼 보였다 한다

한평생 시만 덖고 닦다 보니

육신 한 장 한 장이 책으로 엮였는지도 모른다

한마디 말씀마다 고졸한 영혼의 사리여서

듣는 이들 모두가 귀먹었다 한다

자신이 쓴 시를 스스로 풀어내자

강당 안은 문자향文字香으로 그득했거니와

몸이 뿜어내는 서권기書卷氣로 저녁까지 환했다 한다

평생을 시로 살았다면

말씀마다 꽃이 피고 새가 울어야 한다

그는 평생 모래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온 낙타였다

길고 허연 눈썹 위에는 수평선이 걸려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달빛처럼 흘렀다 한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잠시 눈을 감자

먼지 한 알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울 듯 요란했다

다시 입을 열어 말을 마쳤을 때

방안에는 오색영롱한 구름이 청중 사이로 번졌다고 한다

그의 시는 오래된 참나무 그늘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지친 걸음을 쉬고 있었다

주변에는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한다

- 『독종』, 북인, 2012.

  

 

* “그”는 시인이다. “그”는 “두꺼운 책”과 같은 존재다. 오랜 독서와 마음공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시에서 문자향 서권기가 절로 일고, 말씀마다 꽃이 핀단다. “그”에 대한 헌사로 읽히는 이 시는 동시에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시”는 “참나무 그늘”과 같다고 했다. 참나무는 진짜 나무다. 가짜 나무가 따로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만큼 베푸는 게 많아서 ‘참’이라는 호칭을 붙였을 것이다. 나무와 열매로 숲을 넉넉하게 하고, 짐승과 사람의 허기를 달래고, 겨울나는 땔거리로 요긴했으니 참 고마운 나무다. 시를 통해 진경을 맛보게 하고, 어리석음을 깨치게 하고, 영혼을 위로하기도 하는 사람도 참 고마운, 참 시인이라 할 것이다.

  소설 <큰바위 얼굴>에는 ‘큰바위 얼굴’을 동경하던 주인공이 마침내 스스로가 큰바위 얼굴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드리운 참나무 그늘에서 쉬어 갔던 시인도 머지않아 누군가에게 서권기 피어오르는 참나무 그늘로 인식될 것이다. (이동훈)

   

 

5.

설마雪馬/ 홍해리

   

 

눈처럼 흰 말

눈 속에 사는 말

눈 속을 달려가는 말

 

설마 그런 말이 있기는 하랴마는

눈처럼 흰 설마를 찾아

눈 속으로 나 홀로 헤맨다 한들

 

설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만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말 달려가는 요란한 소리만 들려올 뿐

 

한평생 허위허위 걸어온 길이라 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하니

말꾼 찾아 마량馬糧을 준비할 일인가

 

오늘 밤도 눈 쌓이는 소리

창 밖에 환한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나를 비우고 지우면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설마를 찾아 길 없는 밤길을 나서네.

- 『비밀』, 우리글, 2010.

 

*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재미난 시다. 대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으면서도 어쩌면 그 일이 현실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지는 못할 때, ‘설마’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은 눈처럼 희고 눈 속에 사는 설마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을 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설마설마하면서 설마를 찾아 나서고자 한다.

  설마를 그리는 시인의 노력은 설마의 달려가는 발굽소리를 듣는 데까지 이른다. 조금만 더하면 설마의 꽁지도 보일 것 같지만, 아마도 그런 일은 생길 성싶지 않다. ‘설마’는 화자가 추구하는 이상적 가치 혹은 궁극의 지향점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좌절하면서도 시인은 현실적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말꾼을 찾아보기도 하고 말먹이도 준비해 둔다.

  여하한 노력 끝에 설마가 욕심으로 가닿을 수 없는 경지임을 깨닫기에 이르렀으나 시인은 밤길이든 꿈길이든 길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다가갈 수 없는 세계인 줄 알면서도 그 세계를 넘보고 싶은 마음 또한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그 위에 외롭게 서 있을 설마를 생각해 본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설마, 설마의 비밀을 캐고 싶다. 시인의 설마에 어설프게 고삐를 매려 하지 않았나 내심 걱정도 하면서.(이동훈)

 

 

6.

개망초꽃 추억 / 홍해리

 

 

막걸리 한잔에 가슴 따숩던

어둡고 춥던 육십년대

술 마셔 주고 안주 비우는 일로

밥벌이하던 적이 있었지

서문동 골목길의 막걸리집

인심 좋고 몸피 푸짐한 뚱띵이 주모

만나다 보면 정이 든다고

자그맣고 음전하던 심한 사투리

경상도 계집애

좋아한다 말은 못하고

좋아하는 꽃이 뭐냐고 묻던

그냥 그냥 말만 해 달라더니

금빛 목걸이를 달아주고 달아난

얼굴이 하얗던 계집애

가버린 반생이 뜬세상 뜬정이라고

아무데서나 구름처럼 피어나는

서럽고 치사스런 정분이

집 나간 며느리 대신

손자들 달걀 프라이나 부치고 있는가

지상에 뿌려진 개망초 꽃구름

시월 들판에도 푸르게 피어나네

- 『금강초롱』, 도서출판 움, 2013.

 

 

* 꽃에 우열이 있을까마는 개망초는 어디든 잘 자라고 너무 흔하기도 해서 대접이 시원찮은 편이다. 또 그 점을 높게 사서 생명력이 강한 친서민적인 꽃으로 주목 받기도 한다.

   시인에게 개망초는 추억의 한때를 관통하여 지금도 “푸르게 피어나”는 꽃이다. 막걸리로 생의 허기를 달래며 길을 찾아 방황하던 “어둡고 춥던” 날에도 정을 주고 정을 내는 마음이 있어 알전구 켜지듯 개망초꽃 핀다.

   “금빛 목걸이”, “얼굴이 하얗던 계집애”, “달걀 프라이”는 꽃술이 노랗고 가장자리가 하얀 개망초 꽃잎에서 연상한 이미지일 텐데 가벼운 인연과 그것마저 통속화되는 세상 이치를 생각하게 한다.

   “가버린 반생이 뜬세상 뜬정이라고/ 아무데서나 구름처럼 피어나는/ 서럽고 치사스런 정분”이란 구절이 서정적이면서도 절묘하다. 속되면서도 사뭇 아름다운 인상을 남기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인생 자체가 통속이라서 그런 걸까. 때를 기다렸다가 개망초꽃에게 물어볼 일이다.(이동훈)

   

 

7.

가을 들녘에 서서/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 우리글, 2012.

 

 

* 연암 선생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눈과 귀만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병이 된다고 했다. 외물(外物)에 현혹되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걸 보고, 듣고 싶은 걸 듣는다는 이야기도 부정하긴 어렵다.

  눈과 귀는 선입견과 오류의 온상인 데다 욕망이 들어오는 창구이기도 하니 시인의 말처럼 “눈멀고”, “귀먹으면” 어떨까 싶다.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에 따라 눈과 귀를 보완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절실한 일이지만 시인은 그 마음마저 버리라고 한다. 집착하는 마음, 소유하려는 마음,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의미로 와 닿는다.

  “텅 빈 들녘”은 시인이 지향하는 마음자리다. 다 버리고, 다 주어버리고, 눈과 귀가 방해되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 있고 싶은 거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