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시인의 새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가
지난 6월말 ‘도서출판 움’에서 ‘우리詩 시인선(037)’으로 나왔다.
어디서 많이 본 시 같아 찾아 읽어 보니,
요즘 한창 ‘페이스 북’에도 올려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 몇 편을 골라
지난 7월 중순에 다녀온 강천산 숲길 사진과 같이 올린다.
♧ 송화단松花蛋*
잘 삭힌 홍어처럼이나
오리알이 푹 삭고 나면
제 몸속에 송화를 피운다
꾀꼬리 울 때
노랗게 날리는 송홧가루
그 사이를 날아
새는 소나무 속으로 숨고
알은 썩어서도
꽃을 피워 제 몸을 연다
드디어
백자 접시에 현현하니
천하 진미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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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단 : 피단(皮蛋)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삭힌 오리알.
♧ 달항아리
백자대호나 원호라는 명칭은 너무 거창하다
좀 촌스럽고 바보스런 달항아리
우리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넉넉하고 봉긋한 그 배가 아니겠는가
먹을 것 없어 늘 배가 비어 있어도
항아리는 배가 불룩해서 그지없이 충만하다
달이 떠서 밝아도 보름이고
달 없는 칠흑의 밤에도 보름달이다
문갑 위에 놓으면 방 안에도 달이 뜨고
아버지 가슴에도 달빛이 환하다
찬장 위에서 가난을 밝히는 달항아리
그것을 바라다보는 마음마다
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는 달로 뜬다
어린 자식의 응석을 다 받아주고 품어 주는
어머니가 항아리를 안고 계신다
세상 사는 일 가끔 속아 주면 어떤가
어수룩하다고 바보가 아니다
어머니가 항아리 속 아버지 곁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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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磁大壺와 圓壺는 달항아리의 다른 이름.
♧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
풀 한 포기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들꽃 한 송이
또한 그런 듯하지만,
저 여리디여린 풀·꽃도
지옥 같은 더위와 비바람을 다
견디어 내고 나서 제 몸을 연다
한 채의 찬란한 우주를!
풀잎은 왜 뾰족한가
두근거리는 네 눈빛 때문이다
꽃잎은 어째서 울퉁불퉁한가
그 속에 음순이 춤추고 있어서다
배추 절 듯 전 그대의 오후
허공을 천천히 산책하고 있는
풀꽃 한 송이
네 앞을 환히 밝히고 있지 않는가.
♧ 량허란써징디엔洋河藍色經典
-하이즈란海之藍
양하남색경전은 중국의 술이다
해지람이란 상표가 시원하기 그지없다
술을 보고 경전이라니,
아니 맞다!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게 해 주는 게
술보다 나은 게 없지
48%짜리 차갑고 뜨거운 바다를
임보 시인과 둘이서 다 퍼냈다
바닥이 난 바다는 허무했다
예수는 맨발로 바다를 건넜는데
우리는 신발을 신은 채
쪽빛 바다를 흔들리며 건넜다
몸속에서 불이 타올라
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주酒는 주主의 길을 그냥 가게 했다
어쩌자고 바람은 온몸으로 불어오는지
바다는 쪽빛으로 푸르고
빈 바다가 술병에서 잠녀처럼
휘익! 휘익!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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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량허란써징디엔 : ‘량허’는 술 이름, ‘란써’는 남색이니, 양주의 블루 컬러, ‘징디엔’은 經典, 즉 클래식. 양주 이름처럼 폼을 잡아 ‘량허’, 즉 술 중에 상급 블루 브랜드라는 뜻. ‘하이즈란’은 부제.- 金金龍(시인)
♧ 납량納凉
저녁때 논에 물을 보러 나갔다.
이웃이 물을 빼 자기 논으로 넣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져 삽으로 내리쳤다.
열아홉 딸애가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배꼽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염소뿔이 녹는 폭염·가뭄이 계속되었다.
내리 며칠을 퍼붓는 비가 멎지 않았다.
물이 넘쳐 방축이 무너졌다.
둑 아래 논이 몽땅 씻겨내려갔다.
1950년 8월의 일이었다.
♧ 서우瑞雨에게
꽃이 피는데
너는 떠나가 버리는구나!
꽃이 져도
난 너를 보내지 않는다.
꽃이 피고 지고
또 피었다 지는,
먼 그때에도
나는 너를 보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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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봄에 만나 55년을 함께한 친구인 瑞雨/素江 이무원李茂原 시인이 2015년 4월 17일 이승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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