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스크랩] 홍해리 시인의 시와 애기도라지

洪 海 里 2016. 8. 18. 04:13


부채[]

 

한평생

바람만 피웠다.

 

여름내 무더위에

몸뚱어리 흔들어 쌓다,

 

살은 다 찢겨나가고

뼈만 남아,

 

초라한 몰골,

아궁일 바라보고 있다.

        

 

거미줄

 

거미줄은 고무줄이 아니라

거미가 허공에 이룩한 제국의 영토.

 

추상적이지만 기하학을 전공한 건축기사의 집

신을 거부한 폭력의 집

우주 통신을 하는 비밀 안테나를 달고 있는 집

기차가 은하까지 달리는 무한 궤도를 가진 집

문만 있는 무작정 기다리는 집

하늘이 보이는 몽땅 비운 집

문이 없어도 들어가기만 하는 무게가 없는 집

비 오면 다이아몬드 물알을 낳는 집

결핍을 먹고 완벽한 사랑을 추구하는 집

바람변주곡에 그네 타는 출렁집

하늘에 던져 놓은 푸른 냄새가 나는 허방집

짓다 만 듯한 완벽한 그물집

구름이 걸려 흔들리는 황홀한 집

집착의 끈으로 단단히 매어 놓은 집

무모한 견고함 같은 부드러운 집

쓸데없는 말 한마디도 없는 집

돌돌 말아 놓은 미라의 집

살아 있어 죽어 있는 공존의 집

 

거미집은 거미의 몸,

위대한 우주.

    

 

 

처서處暑

 

풀벌레 소리 투명하여

귀그물[耳網]에 걸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귀 기울여 들어보니,

 

무소유無所有란 소유한 것이 없음이 아니라

라는 가장 큰 것을 소유함이니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인 것처럼

와 무는 하나니라하고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속도 절도 없는 내 귀에 들릴 리 있겠는가

속절없는 일이다!

 

투명한 것은 바로 칠흑이라서

그냥 귀에 가득 차는 것이니

들어도 들리지 않는 허공일 뿐

소리 없는 노래였다.

 

그것이 바로 무소유였다.

        

 

 

세상살이

 

까마귀가 까아옥까아옥 웁니다

다른 까마귀가 따라 웁니다

또 다른 까마귀가 흉내냅니다

물빛 그리움도 죽었습니다

까악까악 하늘이 까맣게 물듭니다

햇빛 한 줄기도 죽었습니다

까아르까아르 까옥대는 소리밖에

까마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까아욱까아욱거리는 까마귀 소리,

사랑도 새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세상이 새카맣게 타들어 갑니다

까옥까옥까르까르까악까악깤깤!


 

 

이승역

 

청산행靑山行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50m, 10m, 5m, 3m, 2m, 1m,

그리고~~~.

 

서서히 열차가 멎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그가 갔다

이렇게 찰나가 영원을 만드는 이승이란 역.

        

 

 

길은 살아 있다

 

길이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길에도

날개와 지느러미가 있어 날고 기고 헤엄친다

길이 흐느끼며 절름절름 기어가고 있다

길이 바람을 불러 오고 물을 흐르게 한다

꽃도 길이 되어 곤충을 불러 모은다

길은 긴 이야기를 엮어 역사를 짓는다

길에는 길길이 날뛰던 말의 발자국이 잠들어 있다

길이길이 남을 길든 짐승의 한이 서리서리 서려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몸에 길이 있다

영혼도 가벼운 발자국으로 길을 낸다

태양과 별이 지구를 향해 환한 길을 만든다

시간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이다

기다리는 길이 끊어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발바닥 아래 생각이 발딱거리며 가고 있다

사랑도 이별도 길이 되어 멀리 뻗어나간다

사람도 길이 들고 길이 나면 반짝이게 된다

눈길 손길 발길 맘길로 세상을 밝힌다

가장 큰 길은 허공과 적막이다

발자국은 앞서 가지 못한다

길은 따뜻하다.

 

--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에서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