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밤
홍해리 선생의 시집 ‘치매행致梅行’을 편다.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
이 시집 ‘치매행致梅行’을 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이름만 크고 속빈 강정이 아니기를!
또한 결코 치사찬란恥事燦爛한 일이 아니기를!
--‘시인의 말’에서
몇 편을 골라 읽고
자주색달개비 꽃과 같이 올린다.
♧ 뚜껑
-치매행致梅行 · 38
귀한 술은 함부로 뚜껑 열지 마라.
널 가둘 뚜껑 하나 있으면 좋겠다.
너도 나를 품고 뚜껑을 닫아 다오.
나도 네게는 좋은 술이 되고 싶다.
닫든 따든 뚜껑이라는 말 참 좋다.
아내여, 그대는 나의 뚜껑이었다.
♧ 탈옥脫獄
-치매행致梅行 · 39
너댓 살 소녀랑 외출을 합니다
두셋 서넛 지나 너더댓입니다
버스 옆자리에 꼭 붙어 앉습니다
손을 잡고
팔짱을 낍니다
닭살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지쳐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 세 병을 삽니다
한 병 두 병 세 병 마시고 나면
세상이 둥글어집니다
모든 게 평안하게 굴러갑니다
아내에게 저녁은 줬는지
약을 챙겨 주었는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때로는 먹는 것도 잊어먹는 것이 행복합니다
닭살이 닭의 살인지도 모르는 게 좋습니다
나는 나도 잊어버리는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늘 미수에 그치고 마는 탈옥을 시도합니다.
♧ 위리안치圍籬安置
-치매행致梅行 · 40
귀양온 선비
탱자나무 울타리
혼자서 바라보는
저 푸른 하늘
말없이 말해 주는
바람소리
그것도 괜찮겠다
천하에 바라노니.
♧ 맹꽁이타령
-치매행(致梅行) · 41
사는 게 답답해서
막걸리 한잔으로 취생몽사합니다
어쩌다 아내의 종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아내가 나의 종이었습니다
버리는 게 아까워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이 못난 맹꽁이는 한겨울에도
낯선 거리 뒷골목에서
맹꽁맹꽁 웁니다
소리는 나지 않고 울음주머니만
부풀었다 죽었다 합니다
맹꽁맹꽁!
♧ 허수아비
-치매행致梅行 · 42
사내도 때로는 나락에 떨어져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오동의 속살을 밤새도록 손톱으로 타는 밤이 있다
한평생이 독같이 외로운 어둠의 길이어서
울리지 않는 은자隱者의 북을 두드리면서,
홀로 고독해지고 있는 저 들판의 저녁녘
너덜거리는 옷때기 한 자락 걸치고 있는,
나는 가슴 텅 빈,
허수어미의 허수아비.
* 홍해리 시집 : 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
‘치매행致梅行’(황금마루, 2015.)에서
사진 : 요즘 골목길에 피고 있는 자주색달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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