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스크랩] 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

洪 海 里 2016. 10. 14. 10:21


깊어가는 가을 밤

홍해리 선생의 시집 치매행致梅行을 편다.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

   이 시집 치매행致梅行을 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이름만 크고 속빈 강정이 아니기를!

   또한 결코 치사찬란恥事燦爛한 일이 아니기를!

        --‘시인의 말에서

 

몇 편을 골라 읽고

자주색달개비 꽃과 같이 올린다.

    

 

 

뚜껑

    -치매행致梅行 · 38

 

귀한 술은 함부로 뚜껑 열지 마라.

 

널 가둘 뚜껑 하나 있으면 좋겠다.

 

너도 나를 품고 뚜껑을 닫아 다오.

 

나도 네게는 좋은 술이 되고 싶다.

 

닫든 따든 뚜껑이라는 말 참 좋다.

 

아내여, 그대는 나의 뚜껑이었다.

    

 

 

탈옥脫獄

    -치매행致梅行 · 39

      

너댓 살 소녀랑 외출을 합니다

두셋 서넛 지나 너더댓입니다

버스 옆자리에 꼭 붙어 앉습니다

손을 잡고

팔짱을 낍니다

닭살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지쳐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 세 병을 삽니다

한 병 두 병 세 병 마시고 나면

세상이 둥글어집니다

모든 게 평안하게 굴러갑니다

아내에게 저녁은 줬는지

약을 챙겨 주었는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때로는 먹는 것도 잊어먹는 것이 행복합니다

닭살이 닭의 살인지도 모르는 게 좋습니다

나는 나도 잊어버리는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늘 미수에 그치고 마는 탈옥을 시도합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치매행致梅行 · 40

 

귀양온 선비

탱자나무 울타리

혼자서 바라보는

저 푸른 하늘

말없이 말해 주는

바람소리

그것도 괜찮겠다

천하에 바라노니.

        

 

 

맹꽁이타령

    -치매행(致梅行) · 41

 

사는 게 답답해서

막걸리 한잔으로 취생몽사합니다

어쩌다 아내의 종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아내가 나의 종이었습니다

버리는 게 아까워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이 못난 맹꽁이는 한겨울에도

낯선 거리 뒷골목에서

맹꽁맹꽁 웁니다

소리는 나지 않고 울음주머니만

부풀었다 죽었다 합니다

맹꽁맹꽁!

       

 

허수아비

    -치매행致梅行 · 42

 

사내도 때로는 나락에 떨어져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오동의 속살을 밤새도록 손톱으로 타는 밤이 있다

 

한평생이 독같이 외로운 어둠의 길이어서

울리지 않는 은자隱者의 북을 두드리면서,

 

홀로 고독해지고 있는 저 들판의 저녁녘

너덜거리는 옷때기 한 자락 걸치고 있는,

 

나는 가슴 텅 빈,

허수어미의 허수아비.


* 홍해리 시집 : 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 

                     치매행致梅行’(황금마루, 2015.)에서 

   사진 : 요즘 골목길에 피고 있는 자주색달개비.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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